Browse

17세기 조선의 관물론(觀物論)에 나타난 완물(玩物)과 천기(天機) 개념의 연구

Cited 0 time in Web of Science Cited 0 time in Scopus
Authors
손정희
Advisor
박낙규
Major
미학과
Issue Date
2012-02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Description
학위논문 (석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미학과, 2012. 2. 박낙규.
Abstract
본 논문은 17세기 조선의 관물론(觀物論)에 나타난 완물(玩物)과 천기(天機) 개념에 관한 연구이다. 보다 중점적으로는 17세기 관물론에 보이는 물(物) 인식과 완물, 리(理)와 천기 개념의 연결망을 추출하여 사유 패턴의 변모를 읽어나가는 데 그 목적을 두었다.
17세기 서울․경기지역 문인들에게 보이는 새로운 물 인식은 자연 원리와 마음을 중시하는 소옹(邵雍, 1011~1077) 상수학(象數學)의 관점과 연관되며, 상수학풍의 형성은 조선에 소옹의 관물 정신이 확산될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다. 특히, 17세기 초반 침류대시사(枕流臺詩社)를 중심으로 화담학파(花潭學派)의 상수학풍은 신흠(申欽, 1566~ 1628)-신최(申最, 1619~1658)를 통해 조성기(趙聖期,1638~1689)-김창협(金昌協, 1651~1708)·김창흡(金昌翕, 1653~1722) 등 서인(西人)으로 이어지면서 심(心)과 물(物) 양 방향에서 새로운 전환점을 향하고 있었다. 즉, 서인 계열의 관물론은 사물 인식의 시각 전환에 관한 내재적 담론 구축을 마련하고 있었고, 사물에 대응하는 주체의 마음의 역할을 주목해나간 자기 논리화 과정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본 논문은 17세기에 형성된 이들의 관물론을 통해 17세기 이후 물의 존재 가치를 발견해 나가며, 존재 원리를 현실 속에서 체험하는 주체[마음]의 인식 과정을 유기적으로 설명하고자 한 것이다.
조선시대에 유지된 도덕적 관물 전통에서 객체인 사물은 주체의 덕성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될 뿐, 이를 가까이 할 경우 완물상지(玩物喪志)로 빠질 수 있는 경계의 대상이기도 하였다. 그런 가운데 이리관물(以理觀物)과 이물관물(以物觀物)을 주축으로 한 소옹의 관물론은 16세기부터 점차 정착되기 시작하였고, 서경덕(徐敬德)을 기점으로 17세기에 접어들면서 서울․경기지역 문인들을 통해 보다 확대되었다. 특히, 이들의 물 인식에 보이는 특징은 물에 대한 긍정적 시선과 도학적 근거하에 이루어진 완물의 수용으로 정리할 수 있었다. 이들은 기존에 존속되어 있던 공물(公物)과 대공(大公) 의식을 소옹의 이물관물의 논리에 끌어와 물을 인간과 동등한 가치로 보았으며, 사물에 대해 집착하거나 얽매이지 않을 수 있음을 표방함으로써 완물상지를 비껴 설 수 있었다. 나아가 완물의 도학적 근거는 조성기나 김창협에서 확인되듯이 물에 얽매이지 않는 주체의 고요하고도 사심없는 마음과 고금(古今)‧범성(凡聖)을 관통하는 이일(理一)의 동일성을 통해 구축되고 있었다.
또한 관물의 인식 내용인 리는 역학적 세계관으로 재해석된 천기 개념의 함의를 살펴보는 과정에서 그 연관성이 드러났다. 특히, 17세기 서인들 중에는 관물을 통해 존재법칙의 공통된 근원으로서 리를 주시하며 천기와 연결시키는 경향이 드러났고, 이들이 논하는 이리관물의 '리'가 바로 곧 천기와 같은 의미층임을 밝힐 수 있었다. 즉, 이들이 관물을 통해 보려한 물리(物理)의 묘가 곧 사물의 고유한 물성(物性)이자 그것이 곧 천기였던 것으로 리와 천기 개념의 연관성을 정리할 수 있었다. 관물 정신은 천기론으로 향하고 있었고, 이들이 주장하는 진시(眞詩)는 인위적 안배의 영역, 즉 주관적 사사로운 정감을 포함한 바르고 마땅함, 청탁과 시비의 도덕적 분별을 논하지 않는 것을 요건으로 하고 있었다. 물론 이는 자연의 원리이자 천기가 지니는 개념적 속성이 시론화된 특징적 면모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들이 지칭하는 진시는 사물이 지니는 자연 그대로의 본성을 비추는 투명한 마음을 거쳐 자연스럽게 발현되는 것으로 정리될 수 있으며, 그만큼 물 자체의 가치를 존중하고, 물을 인식하는 마음을 중시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17세기 관물론이 지니는 의미는 18세기에 보다 뚜렷한 의미로 부각된다. 18세기는 사소한 사물에까지 벽(癖)을 표방하며 광적으로 몰두하는 현상이 일어나는데, 서울을 중심으로 한 도시 문화의 발달과 함께 화훼 재배와 정원 경영이 성행하였으며, 서화완상(書畵玩賞) 취미가 성황을 이루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서책을 소장하는 장서가(藏書家)가 경화세족(京華世族)을 중심으로 확산되었으며, 서적 유통 시장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사물에 대한 박물학적 관심에서 이루어진 백과전서적 지식 문화가 형성되었다. 문예현상에서도 산수유람의 성행과 유기문학(遊記文學)은 벽(癖)과 취(趣)의 연장선상에서 다루어졌으며, 천기론의 기치 아래 천지간의 온갖 사물은 시로 읊어질 수 있었고, 조선의 산수를 그린 진경산수(眞景山水)의 유행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현상은 물의 위상이 그만큼 높아진 것을 반증하는 것으로, 물을 긍정하고 도학의 차원 하에서 완물에 접근한 17세기의 논리적 확보 과정이 없었다면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라 본다. 이와 함께 사물의 본원을 인식하는 주체의 마음을 중시하여 그 능동성을 실천해 나간 것 역시 18세기 문인들의 주관화 과정에 있어 거쳐야 할 거점이었다고 생각된다. 그야말로 물(物)과 인(人)이 그 자체로 가치있는 시대를 확보하기 위한 전단계로서의 준비를 17세기에는 충분히 이루어나가고 있었다.

This study is regarding the concept of cheongi (天機) and wanmul (玩物) based on the theory of gwanmul during the seventheenth century Joseon. The purpose of the study is concentrated on the interpretation of the transfiguration of the pattern of thoughts by extracting from the network between the concepts of cheongi and the Ri (理) and between those of wanmul and the perception of things (物), found in the theory of gwanmul (觀物) during the seventeenth century Joseon.
Among the scholars of Seoul and Gyeonggi regions, a new method of perception of things was related to the perspective of the learning of images and numbers (象數學) by Shao Yong (邵雍, 1011~1077), Song Chinese Neo-Confucian scholar, which is focused on the principles of nature and the Mind (心); and such promotion of Shaos learning became the foundation for dissemination of gwanmul by Shao in Joseon. Specifically centered on Chimnyudae Poets Society (枕流臺詩社) in the early-seventeenth century, the Hwadam Schools (花潭學派) academic traditions of the learning of images and numbers has transferred to the Western Party (西人), which included Jo Seong-gi (趙聖期, 1638~1689), Gim Chang-hyeop (金昌協, 1651~1708), and Chang-heup (金昌翕, 1653~1722) brothers, through Sin Heum (申欽, 1566~1628) and his grandson Sin Choe (申最, 1619~1658). They had come to make a new turning point in both the Mind and things. In other words, the theory of gwanmul by the scholars from the Western Party had been preparing the construction of the immanent discourse regarding the change in perspectives when perceiving things; and it focused their attention on the role of the Mind as it responds to them. This study seeks to organically demonstrate the recognition process by the subject as it discovers the existence value of things and experiences the principles of existence through the theory of gwanmul formed in the 17th century.
In the tradition of moral gwanmul kept throughout Joseon era, things, which are the objects, had been used only for the purpose of cultivating the moral nature of the subject; and this was heavily due to the scholars thought that once one begins to be indulged in things, he might lose his mind (wanmul sangji 玩物喪志). Meanwhile, starting with Seo Gyeong-deok (徐敬德, 1489∼1546, alias Hwadam), Shaos gwanmul centered in iri gwanmul (以理觀物) and imul gwanmul (以物觀物) had begun settling down in the sixteenth century Joseon, it was more actively spread among the scholars in Seoul and Gyeonggi regions. Especially, their distinguishing characteristic in perceiving things could be summarized into the positive attitude toward them and the acceptance of wanmul on the dohaks (道學) grounds. They have brought the idea of gongmul (公物) and daegong (大公), which has been continuously existing, into Shaos logic of imul gwanmul and considered things and man with equal value. Also, by advocating the possibility of not being entangled or addicted by outer things, they were able to avoid wanmul sangji. Furthermore, the dohaks grounds of wanmul was being constructed upon the logic that the selfless Mind is not bound by things and the identity of ri-il (理一) that penetrates the past and present, the ordinary man and the Sages (凡聖) as the theory were confirmed by Jo Seong-gi and Gim Chang-hyeop.
Moreover, the Ri, which is the perceiving content of gwanmul, was found in the relationship between itself and cheongi, during the observation process of the implication of the concept of cheongi that has been reinterpreted through the world view of yeokhak (易學). Especially, in the seventeenth century, Western Party scholars have shown their tendency to relate cheongi with the Ri which is considered the common origin of the principle of existence through gwanmul; in addition, the Ri in iri gwanmul which they discuss was revealed to have the same meaning with cheongi. In other words, the principles of things (物理) they tried to see through gwanmul was determined to be the indigenous nature of things (物性), which is equal to cheongi; thus it became possible to formulate the connection between the concepts of cheongi and the Ri. The spirit of gwanmul has been heading toward the cheongi theory, and the so-called jinsi (眞詩) they proposed relieved from the artificial arrangement of moral distinction and subjective sentiments.
Obviously, this was the distinguishing aspect of poetics in which the conceptual attributes of cheongi have been pervaded. Therefore, their jinsi can be summarized as the natural manifestation through a pure Mind that reflects the true nature of things; and thus it can be understood that they have respected the value of things themselves and also concentrated heavily on the Mind that perceives things. The meaning of the seventeenth century gwanmul can be found mainly in two points: the search for the true nature of things through gwanmul, and respect of the value of things itself, and the emphasis on the active role of the Mind that perceives things.
The implication of the seventeenth century gwanmul came to receive remarkable spotlights in the succeeding century. That is, the enthusiasm toward things and the trend of arts, reflecting the encyclopedic tastes occurring in Seoul in that century, would have been impossible if there have not been any process of logical assurance in approaching wanmul that affirmed things and went through the dohaks grounds in the seventeenth century. Along with that, practicing the active role of the Mind that perceives things is considered to be one of the basis to pass during the process of subjectivization in the eighteenth century. Certainly the seventeenth century had sufficiently constituted the base to secure the new era which would value things and man themselves for their existence.
Language
kor
URI
https://hdl.handle.net/10371/154870

http://dcollection.snu.ac.kr/jsp/common/DcLoOrgPer.jsp?sItemId=000000001176
Files in This Item:
There are no files associated with this item.
Appears in Collections:
College of Humanities (인문대학)Aesthetics (미학과)Theses (Master's Degree_미학과)
  • mendeley

Items in S-Space are protected by copyright, with all rights reserved, unless otherwise indicated.

Brow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