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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晉南朝時代 長江中流域 硏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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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홍정아

Advisor
朴漢濟
Major
동양사학과
Issue Date
2012-02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Abstract
東晉南朝時代 長江中流域 硏究

長江中流域은 어느 시대에나 늘 주목을 받아왔던 지역은 아니었다. 이 지역이 정치적으로 의미있게 등장했던 것은 늘 분열의 시대가 도래했을 때였다. 특히 東晉南朝時代 荊州刺史는 分陝의 칭호와 함께 建康 조정에 맞설 수 있을만큼 그 역량을 발휘하였고, 長江中流域의 중요성은 더욱 증가하였다. 그 힘의 근원은 무엇이었을까? 또한, 그 내부적인 한계는 없었던가? 필자는 이와 같은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長江中流域에 존재했던 분열적 요소와 그들 간의 통합 노력을 모두 다섯 章에 걸쳐 살펴보았다.
우선 東晉南朝시대 長江中流域의 행정구역에 대해 살펴보고, 과연 分荊정책이 곧 성공적인 弱荊이었던가에 대해 탐구해보았다. 그간 荊州의 분할은 실질적으로 荊州刺史의 힘을 크게 약화시켰다고 평가되어 왔다. 東晉代 너무 강해진 荊州의 힘을 분할하기 위해서 劉宋 이래 행정구역의 분할이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실제 州의 분할에는 建康 정권의 의도가 상당히 반영되었다. 分荊정책 시행 이후, 長江中流域을 기반으로 일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기반이 되는 하나의 州만으로는 어려워 반드시 인근 다른 州刺史를 포섭해야했다는 점에서 東晉代와는 차이가 생겼다. 그러나, 荊州 분할정책이 취해지면서도 荊州刺史가 여전히 몇 주의 都督을 겸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고, 유사시에는 荊州로부터 분리되어나간 지역들을 재통합시키는 조치가 행해지기도 했다. 즉, 建康 정권으로서도 軍事 重鎭으로서 長江中流域의 힘을 완전히 와해시킬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 힘을 견제하면서도 또 유지하려고 하는 모순적인 상황이 반복되었다.
또한, 州의 분할에는 중앙-지방 간 갈등 구조 해소라는 정치적 목적이 강하게 반영되었다고 해도, 그 하부 행정단위로서 郡ㆍ縣급 행정구역의 분할 및 廢置는 단순히 建康 정권의 의도에 맞추어 행해진 것이 아니었다. 郡縣급 행정구역 변화에는 州의 분할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 밖에도 전란과 남북 간의 군사적 갈등, 流民의 발생과 그들의 정착 문제, 蠻에 대한 대책, 지역 내 지형의 변화 등이 영향을 주고 있었다. 아울러, 행정의 편의성과 함께 해당 지역의 안정성과 개발 가능성도 고려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荊州 분할에 대해 당시 長江中流域 지방관 및 지역민들의 반대를 찾아보긴 힘들다. 비록 각 刺史 이하 지방관들은 자신이 관할해야하는 지역범위가 협소해졌지만, 분할 조치가 행해질 당시 정황상 반발의 여지가 없었다. 또한, 지역 역량의 기반이 되는 인구는 계속 증가하는 상태였으므로 오히려 관할 지역 개발에 나설 수 있는 기반이 잘 갖추어진 셈이었다. 더구나, 행정구역의 분할로 인해 長江中流域 내 刺史, 太守, 縣令 등 직임의 숫자가 전대에 비해 전체적으로 증가하게 되었다. 州刺史를 정점으로 한 州府 계통의 관직수가 늘어남에 따라, 주로 州府에 진출하였던 長江中流域 士族에게는 출사 기회가 확대될 수 있었다. 또한, 서로 다른 계통의 사람들을 조금 더 작은 행정단위로 분리시킴에 따라서 지역 내 분열적 요소들이 마찰하며 발생할 수 있는 갈등의 소지가 줄어들었으며, 그 결과 지역 내 안정성은 증진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長江中流域의 행정구역 분할은 建康정권의 입장에서 荊州를 축소, 견제하기 위한 의도로 행해졌고 郢州의 예에서 보듯 어느 정도 영향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長江中流域의 지역인들 입장에서도 자신들의 출사로가 확대되고 지역의 개발에도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는 방책이었다.
그렇다면, 長江中流域 전체의 내핵이 되는 지점은 어디였을까? 長江中流域에는 복잡한 물길들이 존재하였으며, 그 중심에 위치한 곳이 바로 江陵이었다. 江陵은 後漢末 정치적 상황과 水系의 변화 속에 일시적으로 지역 중심으로서의 위상을 잃었고 자연재해 역시 적지 않았지만, 地域 내 水路 네트워크의 필요성이 높아졌을 때 여전히 상대적으로 가장 유리한 조건 하에 있었다. 兩晉代에 걸친 治水 사업을 통하여 江陵은 漢水와 長江 水系에서의 중심 도시로서의 위치를 다시금 회복할 수 있었다.
다만, 江陵은 荊州 내 주요 생산지로서보다는 편리한 교통을 기반으로 한 물류중심으로서의 의미가 더 컸다. 그 곳은 대규모 유동인구를 수용할 수 있는 항구가 있었고, 배를 갈아타야하는 지점이기도 했으므로 상업 발달에 유리하였다. 비교적 인구가 많았던 江陵은 糧食 공급의 안정적인 배후지가 필요했는데, 가장 두드러진 루트가 江陵-巴陵 선이었다. 비록 江陵 자체의 방어능력이 특별히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홀로 버티기 어려운 경제적 한계로 인해 물길을 통한 배후지로부터의 물자의 공급이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사통팔달의 교통로는 江陵이 지역 중심지로 성장할 수 있게 된 강점임과 동시에, 이 지역에서 쟁탈이 일어날 때는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도 있었다. 江陵이 직접 공격을 받을 경우보다 오히려 그 주변이 함락되었을 때, 江陵의 민심은 바로 동요했다. 그 직접적인 원인은 江陵과 그 경제적 배후지가 단절될 것에 대한 우려, 江陵지역의 식량 및 물자의 공급 문제에 대한 걱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建康정권으로서나 長江中流域의 지역책임자의 입장에서는 南北 간의 군사대치 상황에서 이와 같은 江陵의 약점을 보완하여 長江中流域 전체가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할 조치가 필요하였다. 따라서, 경제적인 면에서도 지역종합성을 완성시킬 정치체의 필요성이 높아졌고, 東晉南朝時代 이 지역의 책임자는 늘 荊州刺史를 겸하거나 거느린 都督이 되었으며, 대지역으로 荊州를 규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지역 전체의 네트워크를 활성화시키는 방향으로 이루어진 江陵의 개발은 그 자연 지리적 환경에 적합한 것이었다. 비록 정치적 혼란기에는 배후지가 확보되지 않는 한계를 노출하였으나, 江陵이 배후지를 확보하여 안정되고 지역 내 水路 네트워크가 원활하게 움직일 때, 江陵을 축으로 한 長江中流域 전체는 朝廷과 대립할 수 있을 정도의 충분한 역량을 갖출 수 있었다.
兩晉交替期 이후 長江中流域에서는 流民, 舊民, 蠻 등이 어우러져 새로운 荊州地域民을 이루어가기 시작했으나, 이들 간의 갈등과 통합노력은 東晉왕조 100년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중요 현안으로 남아있었다. 東晉南朝史를 새로운 시각에서 통합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제시된 바 있는 僑舊體制論에서는, 고향을 벗어난 이주민들의 독특한 성격과 활동 양태가 존재함을 지적하고, 또한 僑民과 舊民의 갈등과 융합으로 이 시대가 특징지워지며 그 와중에 나타난 민족과 문화 변용이 隋唐통일기로 이어진다고 지적한 바 있다.
東晉南朝史에서 僑와 舊의 구분은 대체로 北來士族과 吳姓士族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지만, 建康 방면과는 달리 長江中流域에서는 僑와 舊를 간단히 구분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문자적으로 舊民은 토착민을 가리킬 터이지만 長江中流域에서는 잦은 전란과 인구의 이동으로 인해 東晉 이전의 豪族 집단이 거의 와해되어 버렸다. 그 때문에 兩晉交替期에 비교적 빨리 이 지역으로 유입된 僑民이 그 자리를 차지하였다. 그들은 분명 外地에서 유입된 流民이었지만, 한 세대 이상 특정 지역에 정착을 하면서 土着하고 世居하면서 舊民이 되어 버렸다. 이들이 중앙조정에서 지방관으로 파견된 또다른 北來僑民士族 집단과 연합하여 東晉王朝 체제 하에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東晉의 체제가 어느 정도 정착된 이후 晉-宋交替期 長江中流域에 유입된 이른바 晩渡士族은, 비록 關中, 洛陽 지역에서 이주해와서 스스로 高門으로서의 인식이 강했던 이들조차 별 기반없는 이주민의 입장에서 새로이 지역기반을 마련하거나 출세를 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할 수밖에 없었다. 요컨대, 長江中流域에서 僑와 舊는, 이 지역의 체계 내로 들어와서 구성원이 된 先後의 차이를 표시하는 상대적인 개념으로 이해해야할 듯하다.
長江中流域의 사람들은 외지에서 들어온 사람이건, 토착한 이들이건 계층적으로 上ㆍ下로 구분이 되건 간에 모두 仕路에서 중앙정계로부터 견제되거나 배제되었다는 점에서 공통적인 한계를 지녔다. 그 때문에 長江中流域 지역민은 출세 지향이라는 공통의 바람을 가질 수도 있었지만, 그 문제를 풀어나가는 방식은 각자의 입장에 따라 서로 달랐다. 長江中流域 지역민은 토착민과 이주민이 단순하게 분류되지 않는 만큼 그 내부적으로도 다양한 요구와 일치되지 않는 움직임이 있었다.
荊州刺史 劉義宣의 반란과정과 반란에 참여한 사람들의 면면을 통해 僑와 舊의 정치적 선택의 차이를 볼 수 있다. 지역적 기반이 미약한 僑의 입장에서는 반란을 통한 빠른 출세를 지향하였다. 東晉시기를 거치면서 이미 長江中流域의 정치 체제는 완비되었지만, 長江中流域은 군사지리적 특수성과 지형적 특성 등으로 인해 東晉南朝時代 다른 지역에 비해 계속 사회유동성이 컸다. 특히, 이미 고착되어버린 建康의 문벌사회구조보다 상대적으로 기회가 열린 땅이었다. 출세를 모색하다 여의치 않거나, 혹은 중앙 정계와 대립할 만한 출신과 능력을 지닌 지도자를 만나거나, 중앙 조정에서 자신들을 압박하는 행위가 나타나거나 하는 어떤 특수한 상황이 벌어지면, 長江中流域 지역민의 僑들은 쉽게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여지를 가지고 있었다. 반면, 원래 僑였지만 舊民化한 舊의 입장이 되면 보다 안정적인 출사로를 선택하는 경향이 있었다. 중층적인 모순의 집결지로서 長江中流域에는 늘 僑와 舊의 갈등이 수반되었고, 그들의 가진 다양성으로 말미암아 개개인과 집단별로 쉽게 합치될 수 없는 정치적 선택의 차이가 드러났다.
하지만, 자기 기반을 닦아 생존하고자 하는 僑의 움직임은 長江中流域에서 지역 발전의 동력으로, 혹은 해당지역 최고 정치권력자의 힘으로 작용할 수도 있었다. 덕망과 능력을 지니고 지역민의 공통적인 인정과 지지를 받는 지도자가 등장한다면, 그가 설령 長江中流域 출신 인사가 아니더라도 그를 정점으로 長江中流域 전체가 강한 통합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가령, 雍州刺史 蕭衍은 僑와 舊, 荊과 雍을 하나로 묶음으로써 東昏侯에 맞서고 훗날 梁을 건국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즉, 長江中流域 僑舊가 화합하고 협력한다면 建康 조정을 압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僑民, 僑寓는 이주민, 舊民은 원래 이 지역의 체제 안에서 살고 있던 주민이라고 하고 그들을 합쳐 僑舊라고 칭한다면, 長江中流域에는 그 범주에 속하지 못한 蠻이 존재했다. 蠻은 漢族과 대비되는 이민족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東晉南朝라는 漢人 정치체제 밖에 존재한 타인들이라고 하는 것이 가장 적당하다. 蠻에 대한 종족적인 구분이 아예 없거나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기존 사료에서는 그보다 보편적으로 지역적인 구분과 그에 따른 命名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 이유는 첫째, 蠻의 종류가 번다하고, 거주한 지역이 넓어 그들 상호간의 혼재 가능성이 높다는 것과, 둘째, 蠻-漢의 융합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아 이들을 혈통적으로 漢族과 非漢族으로 구분하기 불가능했던 까닭이었다. 蠻이라는 호칭은 南方 소수민족에 대한 범칭으로도 사용되었는데, 그 까닭은 南蠻에 대한 초기의 認識이 野蠻이었기 때문이었다. 즉, 蠻은 漢族에 비해 落後된 존재로 평가되었으며, 蠻의 개념은 처음부터 종족적인 구분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漢族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급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관점에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長江中流域에서의 對蠻정책은, 蠻族에 대한 討伐과 그들에 대한 招撫로 나타났다. 州 밑에 두어진 左郡, 左縣 및 蠻府(각 校尉府)가 蠻에 대한 통제와 관리의 책임을 맡았다. 東晉南朝의 州와 校尉府는 蠻에 대한 억압ㆍ강경책과 초무ㆍ유화정책을 동시에 사용하였지만, 招撫와 懷柔정책에도 반드시 武力 기반, 즉 蠻에 대한 강력한 통제력이 갖추어져야 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蠻族의 北朝로의 移動은 南朝에서 행해진 차별대우와 지나친 收奪과 같은 對蠻對策에 대한 반발과 함께, 北朝의 蠻에 대한 유도, 높은 처우에 대한 약속 등으로 촉발되었다. 반대로, 그들의 南朝로의 재이동은 南朝의 유도책과 北朝에서 시작된 蠻 집단에 대한 억압이 원인이 되었다. 다시 말하면, 蠻의 南北으로의 이동은 南北朝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고려를 통해 자신들에 대해 강압적인 정책을 가지고 있는 쪽의 반대방향으로 이주해갔던 것이다. 이러한 蠻의 이동의 내부에는 蠻族의 무리를 보존함으로써 자신의 권리를 인정받으려는 蠻酋의 개인적인 목적이 반영되어 있었다고 생각한다.
長江中流域 蠻은 지역민의 통합을 방해하는 내재적 요소였으며, 도로를 단절시키고 도적이 되어서 사회 불안을 조성할 위험을 가졌기 때문에 지역 관료의 입장에서 보면 통제하고 다스려야하는 대상이었다. 반면, 蠻은 다방면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長江中流域 지역 관료 혹은 지역민들은 수시로 행할 수 있었던 伐蠻을 통해 蠻들을 노동력으로 삼거나 경제적으로 이용할 수 있었으며, 武將으로서 출세의 발판을 마련하기도 하고, 자신들이 지닌 군사력을 實戰에서 시험해볼 수도 있었으며, 심지어 그들에 대한 討伐을 명목으로 내세우며 군사력을 키울 수도 있었다.
이와 같은 蠻은 僑舊體制라는 큰 틀에서 어떤 존재로 파악되어야할 것인가? 蠻은 長江中流域에 원래 살고 있던 이들이기에 토착민, 舊民으로 볼 수도 있으나, 실제 蠻, 蠻夷, oo蠻의 용어와 蠻民, 蠻戶를 구분해서 파악할 필요가 있다. 前者는 漢族이 중심이 된 지역 정치체제 內에 속하지 않은 異族으로서 그냥 해당지역의 원주민에 불과했다. 그들은 해당 지역의 체제를 이끌어가거거나 세력 기반을 갖추고 있거나 혹은 그 사회를 구성하는 중심요소로서의 舊民은 아니었다. 後者인 蠻民, 蠻戶 등은 出山과 伐蠻을 통해서 漢人의 정치 체제 내로 흡수된 이들을 주로 가리킨다. 그러나, 이들은 長江中流域에 이미 일련의 僑民이 舊民化하여 정착한 이후에 漢人들의 정치 체제로 흡수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流民과 같은 입장에 있었다. 즉, 蠻은 기존 정치 체제 내 흡수되지 못한 외부인으로 볼 수도 있지만, 그들이 일단 長江中流域의 체제 내로 흡수될 때에는 사실상 流民과 같은 존재로서 이주민, 僑의 입장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들 역시 流民과 마찬가지로 생존을 위한 투쟁과 노력이 필요했으며, 長江中流域에서 사회적 안정과 정치적 통합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들에 대한 적극적인 대책이 반드시 요구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荊楚지역문화에 대한 관심과 이를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이 나타났다. 행정구역의 명칭으로서의 荊州는 東晉南朝時代 지속적인 지역적 범위의 축소가 있었음을 언급했지만, 이에 비하여 荊楚라는 용어는 後漢末 행정구역으로서의 荊州 범위와 대체로 일치하며, 더 나아가 문화와 습속, 지역의식을 공유하는 동일문화권의 의미로서 빈번히 사용되었다. 특히, 이를 통해 吳로 대표되는 揚州와 구분할 수도 있었다. 荊楚지역의 풍습은 대체적으로는 揚州와 같았다고는 하나, 競渡와 牽鈎之戲 등의 고유한 요소들이 존재하였다. 이러한 풍습들은 실제 楚로부터 유래했든, 혹은 楚문화라고 칭해지든 간에 대부분 楚와의 연계성을 강조하며 지역민 누구든 쉽게 볼 수 있는 페스티벌과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를 통해 長江中流域 지역민은 荊楚人으로서의 의식을 강화시킬 수 있었다.
長江中流域에 널리 퍼져있던 流民과 蠻의 존재는, 새로운 문화요소가 이 지역에 다양하게 유입되었음을 의미했다. 『荊楚歲時記』 등에 기록된 南人, 北人의 차별화된 풍습들은, 남쪽에서는 토착인과 流民, 蠻의 영향이 뒤섞이며 발전한 강남문화, 북쪽에서는 화북지역에서 五胡를 비롯한 이민족문화와 결합하여 변화한 화북문화로 보아야할 것이다. 荊楚지역의 문화풍습이란 종래 토착민과 새로운 이주민의 문화가 혼합된 결과물이었다.
東晉南朝時代 변용되었으나, 기본적으로 楚문화를 표방하며 지역문화를 계승, 발전시킨 주체는 出鎭한 지방책임자 및 각급 지방관이었다. 여기에 지역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지방민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地域 門閥 士族들이 협력을 하는 방식으로 지역문화의 발전이 이루어졌다. 이 지역은 민심이 쉽게 이반하여 소요를 일으키기 쉽고, 언제든 전쟁이 일어날 수 있어 武를 강조하는 곳이었으므로, 荊楚 지방책임자들은 해당지역의 풍습을 상당히 용인하는 방식으로 지역 안정을 꾀하고 통치 능력을 발휘해야 했다. 또한, 地域 門閥 士族 입장에서는, 門地와 지역성이 강조되는 시대분위기 속에 자기 지역의식을 강화하는 것이 자신들의 명성을 제고하고 나아가 중앙정계로의 진출로를 마련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그들에게는 자신들이 주도하고 있는 지역사회의 인물과 문화습속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이 생겨났다.
이들이 楚문화의 전통을 고수, 혹은 표방했던 것은 지역적 동질감의 문제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겠지만, 더 나아가 당시 상황에서 吳지역(建康정부)의 정치권력이 楚지역(荊楚권역)을 압도한 상황에서 楚지역에 자리잡은 이들로서, 과거 楚가 吳를 통일했음을 강조하고 스스로가 楚문화의 후계자임을 자임하면서 자기들이 그들보다 우월한 면이 있음을 암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지역에 부임한 정치적 야심을 지닌 지방관과 실질적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門閥家門들이 설령 모두 僑의 입장에 있었더라도, 지역의 문화적 정체성을 수호하고자 하면서 끝내 楚라는 이름을 포기할 수 없었던 공통의 원인이었을 것이다.
각급 지방관과 지역의 문벌사족들은 문화풍습을 통해서 서로 다른 내원을 지닌 다양한 사람들에게도 지역 공동체로서의 의식, 荊楚人 의식을 강화시킬 수 있었다. 더 나아가 이와 같은 방식으로 문화적 동일성이 지속적으로 보장되었으므로, 행정구역의 분리나 내부 각 重鎭들끼리의 대립구도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長江中流域은 荊楚文化圈이라는 이름으로 廣義의 荊州로서 통합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荊楚文化는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결과적으로 유사시 長江中流域의 응집력을 높이고 역량을 집결시킬 수 있는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게 되었던 것이다.
西魏의 공격으로 梁이 멸망한 뒤에 長江中流域은 더 이상 南朝에 속한 영토가 아니었다. 하지만 분열의 시대가 아직 종결되지 않았기에 長江中流域 역시 완전히 그 의미를 상실하지는 않았다. 隋唐統一期에 들어선 뒤에야 長江中流域은 분열기에 가졌던 지역 전체로서의 중요성을 상실하였던 것이다.
南北분열기에 長江中流域이 의미를 가질 수 있었던 근본적인 원인으로는 南北 간의 分界 중 한 부분을 담당하였으며, 首都가 위치한 지역의 상류를 점했던 군사지리적 위치를 꼽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 지역을 발전시키고 만들어간 僑와 舊의 존재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된다. 이주민[僑]과 토착민[舊]이 동일한 권력 구조 하에서 구심점을 가지고 잘 융합되었을 때, 長江中流域 지역민은 興起할 수 있었지만, 그들이 갈등을 빚는 순간 한계에 부딪쳐 挫折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僑와 舊의 존재는 隋唐통일기에 들어서면서 자연히 하나로 섞여들어 의미와 구분이 무의미해졌다. 통일정권 하에서 갈등이 봉합되고 마무리되자 長江中流域은 자연히 생동하는 이주민의 에너지를 잃어버렸고 전체 속의 일부로서 특별한 의미를 가지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렇듯 長江中流域은 南北 분열의 시대를 맞이해서야만 중국 대륙의 南北과 東西를 연결하는 십자형 교통의 요지로서, 혹은 강남에 정착한 정권의 군사적 방어벽으로서, 혹은 삶의 기회를 찾아 헤매이던 사람들을 흡수하여 발전하는 기회의 땅으로서 의미를 가졌던 것이다.
长江中游區域('荆州')并不总是用来接收注意力的地区,不过到了南北的"大分裂期",特别東晉南朝時期它发挥自己的力量以引起与建康政权相抗衡的局面。荊揚之爭"是指東晉南朝時期中央與地方的對立,而研究"荊揚之爭"是硏究東晉南朝政治史當中極其重要的主題之一。本篇論文以"荊州"爲主考察什么是"荊州"力量之源, 还有什么因素造成它的限制等問題來硏究长江中游區域,要导出它的分裂因素及其一体化的努力情况。
首先,笔者在本篇論文上探讨了长江中流域的行政区域的变化,证明了刘宋以来分荊政策实际上不是完全的弱荊方案。虽然刘宋以来行政区分割上体现了一些建康政权的政治意图,但是在较低的行政单位郡-縣的变化来讲,有所不同。郡-縣級分区不仅被影响有关州的变化,而且也考虑该地区内的地形变化、该地区的稳定度、区域发展潜力等等。从不同的角度观看,各级守令(刺史, 太守, 縣令)的数量显著增加,特别州府官职数增加会引起该地区的士族出仕机会扩大的结果。另外,依地域民的立场来看,由分荊政策会分离土著民,流民,蛮民等各民族以增进地域稳定性和行政上的便利,幷且减小他们之间冲突而改善生活条件。长江中流域在当时建康政权的國家防衛方面是一定要掌握的重要战略要地,所以建康政权也不能完全放弃大范围的"荆州"。如果发生意外的事,建康政权就实行了再統合荆州的方案而已。
第二,为了探讨荆州经济开发的特点或者限界,本篇文章以江陵为主,考察江陵的地理环境对经济开发的影响及其限制因素,同时研究经过怎样过程江陵又恢复荆州的统治中心地位的问题。
后汉末政局迅速走向动乱,而且荆州的水系也发生不少的变化,江陵终归失去了域内中心的地位。加之自然灾害对江陵本地经济及其人民生活影响也引人瞩目的。可是大分裂时期来临,荆州也需要治理长江水路网。这时候,江陵的地理位置还是比较有利的,所以通过兩晉时期的治水活动,江陵终于恢复了汉水和长江水系上的中心城市的地位。从东晋中期以后江陵一直保持长江中游的中心地位。
江陵虽然是个荆州的主要生产基地之一,但是更重要的是它以方便的交通为基础,成为货物流通的中心。即在荆州经济方面来说,江陵是有利于商业发展的大城市。人众的江陵必须要从背后地供应粮食。据江陵地区的战争过程来分析,背后地中最重要的路线是江陵-巴陵(湘州)之间。但是,四通发达的交通路一面是使江陵成为统治中心的优点,一面在争夺中难以防守的弱点。所以,江陵周边一被陷落,城内的民情就骚动起来,这来由江陵和背后地隔绝的深忧。换句话说,粮食及其他物资供应问题与江陵人民的向背的关系非常密切。
建康政权来讲,或者长江中游域统治者来说,在与华北政权相持的状况下,是弥补江陵的缺陷的措置所必需的。他们共同认识到这片地区需要维持区域综合性的政治体,其结果东晋南朝时期长江中游域的统治者一定是个大都督(大部分兼荆州刺史的职),在长江中游域不得不设置大区域荆州。并且,其统治中心应当是大区域荆州的通都大邑,就是江陵。
如此,从激活全体区域网的方向发展起来的江陵开发比较适合当地状况和自然地理环境。但是,政治斗争频仍,江陵常常露出失去背后生产地的限制,这会变成荆州全体的限制。荆州的水路网通畅,江陵能保持安静的时候,荆州才能施其所长,十分发挥自己的力量。
第三,荊州"不仅是由來已久的交通要塞,而且是流民南下的重要途經。由于人口流動性大,定居率低的狀況下,各地域統治者們(包括都督ㆍ刺史)尽量滿足各民族的不同要求,而施以仁政以努力稳定地域民。但是,长江中游地域民上上下下都有擧行暴動的很大可能性。他们的共同点只是大部分排除来自建康政权,所以都有渴望成功的心理而已。不过,他们面对问题的方式各不相同。按照侨旧体制论的分析,東晉南朝时期的历史由那些脱离故乡人,即'侨民'主导的,并且侨旧之间相互交流和接触建立了隋唐帝国。本篇论文经过有些分析,具体证明移住民['侨']和土著民['旧']的关系和状况。从兩晉交替期而来,流入该地区的侨民分明是个外地人,但是他们在特定地方土着而世居,变成了旧民。在东晋王朝体制下,他们与中央派遣的北來侨民士族联合以发挥自己的力量。东晋末以后流入该地区的晩渡士族虽然是关中、洛陽的高門,在该地区与流民一样没有地域基盘,不得不刻苦的努力。在南朝时期长江中流域,移住民和土著民之间一直发生冲突。甚至侨旧之外还存在一些蛮。虽然他们是长江中流域的原住民,但没被吸收在政治体制的外人。他们开始与汉人融合进入政治体制,被看成流民、侨一样。总之,在长江中流域侨和旧的区别不那么简单,只能理解按照变成本地成员的順序来区别而已。
在東晋南朝时期,因为军事地理的特殊性,在长江中流域的社会流动性比其他地区更大。要生存的侨又是些地域发展的动力,而对该地区的地域統治者又是力量的源泉。另一方面,长江中流域是多层矛盾的聚集场所,总是出现侨旧的葛藤。从失败的反乱,我们容易看出这一点。这才是'荆州'的限制。如果有人把侨旧的葛藤可以缝合在一起,比如萧衍一样以能利用长江中流域的力量,能打败建康政权。
第四, 蛮的实体是什么,他们在长江中流域倒底有什么意义呢? 一般来说,他们是对比汉人的少数民族。不过,本篇文章里指出他们是没被吸收在東晉南朝政治体制的外人。探讨蛮的分流和系统,笔者发现他们名义上只有明显的地域区别,而没有明确的系统区别。这现象的原因,第一是蛮的互相混在可能性非常大,第二是因为蛮-汉融合的可能性也大,所以血缘上不太容易区别汉族和非汉族。
在长江中流域,对蛮政策比蛮-汉区别更重要。地域統治者有时取对蛮讨伐方针,有时对他们招抚,反正总是需要武力,即强力的统制力。東晉南朝时期州和校尉府担任对蛮管理。蛮族往往移动北朝和南朝之间,要保存蛮族集团以得到自己的生存权。在长江中流域,蛮是个社会不安的因素,同时是个可利用的劳动力。地域統治者可以随时伐蛮,其结果他们会获得出仕的基础,也会有机会打实战。在长江中流域一些'侨民'变成'旧民'的过程进行后,蛮也受了汉人的影响以'出山'。蛮民实际上与流民一样没有什么基盘,为了生活他们有时擧行暴动,成为阻碍长江中流域一体化的因素。地域統治者們一定需要採取适当稳定的政策,安服他们,利用他门的劳动力。
第五,在这种情况下,对荆楚地域文化的关注和让它发展下去的努力出现了。荊楚是个与后汉末荊州的范围大概一致的文化圈的意义。在那儿我们可以看到一些地域性风俗-競渡和牽钩之戏等,它们都称为由来楚文化,强调自己的地域性。但是,这时期荆楚地域文化风俗习惯实际上是些侨-旧文化融合的结果物。
荊州的都督ㆍ刺史与其座僚(即地域士族)共同努力荆楚地域文化的发展,为了统合地域民心,而提高自己的門地以进出中央政界。所以,虽然他们基本上都是侨,终于不能放弃楚的名义。荆楚地域文化会强化荊楚人意识,并且继续保存文化的统一性,虽然实行分荆政策,长江中流域维持廣義上荊州。
总之,侨-旧之间发生融合的时候,使他们自己的地域勢力不斷擴大,形成與建康政權相抗衡的勢力。但是,他们之间一旦发生矛盾,就失去自己的力量挫折。到了隋唐统一帝国时期,侨-旧的区别没了历史的意义,并且长江中流域也失去了令人注目的重要性。在荊州"出现的这种现象,只在南北分裂时期反复出现。
Language
kor
URI
https://hdl.handle.net/10371/156307

http://dcollection.snu.ac.kr:80/jsp/common/DcLoOrgPer.jsp?sItemId=00000000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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