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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 古代 帝國의 人力 資源 편제와 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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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이주현
Advisor
김병준
Issue Date
2020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Keywords
帝國人力 資源隸屬 人力徒隸編制財政雇傭外注化再內注化吏役職役EmpireManpowerState-owned labor forcesOrganizationGovernment expenditureEmployEmployeeOutsourcingRe-insourcingLiyi (吏役)Zhiyi (職役)
Description
학위논문 (박사) -- 서울대학교 대학원 : 인문대학 동양사학과, 2020. 8. 김병준.
Abstract
人力의 효과적 운용은 權力의 창출과 유지에 필수적인 요소로, 中國 古代 帝國의 통치자는 일찍부터 제국 내 人力 資源의 편제에 주목해왔다. 광대한 영토와 수많은 백성을 지배하기 위해 제국은 생산, 행정, 건설, 운송 등의 각 업무 항목에 인력을 적절히 배치하였다. 가용 인력의 수량 및 종류는 정치·경제·사회적 조건의 영향을 받았으므로 중국 고대 제국의 인력 자원 운용 방식은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양상을 보이는데, 이러한 변화상은 곧 국가의 통치 방식·이념과도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本 硏究는 이 점에 착안하여 戰國時代에서 三國時代까지 중국의 제국이 인력을 운용하는 방식과 그 변천을 살펴보았다. 본 연구는 戰國時代, 前漢 文帝 재위기, 後漢 말기의 세 가지 분기점을 기준으로 Ⅰ, Ⅱ, Ⅲ장을 구성하였다. 隸屬 人力을 최대한 장악하는 秦의 인력 이용 방식은 전한 문제 13년(BCE 167) 이후 전환점을 맞게 되어 이후 인력 이용의 외주화가 나타나고, 후한 말기에 이르면 다시 인력을 최대한 편제하는 재내주화가 나타나게 되었다.
戰國時代 이후 秦은 신분을 이용하여 인력을 장악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특정 노동으로써 예속 인력의 신분을 명명하는 현상에서 명확히 나타난다. 秦의 徒隸인 隸臣妾, 城旦舂, 鬼薪白粲의 명칭은 특정 노동 종류 혹은 피예속민을 의미하여, 예속적 신분이 해당 노동에 대한 秦의 필요에서 탄생하였음을 보여준다. 즉, 신분이 선험적으로 존재하여 이들에 특정 노동이 부과된 것이 아니라 특정 노동에 필요한 인력을 보충하기 위해 신분이 만들어진 것으로, 신분이란 인력을 편제하기 위한 수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秦은 먼저 제국 운영에 필요한 핵심적 업무‧노동을 설정하고 각 업무‧노동의 성격에 맞추어 예속 인력을 배치하였다. 里耶秦簡 作徒簿와 秦 律令을 분석함으로써 관영수공업, 공전 경작, 행정 잡무, 군사 업무, 건설, 물자 운송의 여섯 가지 항목을 진의 핵심적 업무‧노동으로 정리할 수 있는데, 진은 신분적 속성 및 성별‧연령‧신체 상태로부터 산출한 노동 比價를 고려하여 위의 업무‧노동에 인력 자원을 편제하였다.
관영수공업, 공전 경작, 건설, 물자 운송에는 徒隸가 고루 동원되었으며, 도예가 부족하거나 필요한 경우 居貲贖債, 卒, 黔首도 동원의 대상이 되었다. 첫째, 관영수공업에 투입된 인력 자원은 기술력을 지닌 이들이 주축이 되었는데, 수공업 기술을 보유한 徒隸는 工官에 예속되었으며 庶人으로 속면된 이후에도 工官에 예속되었다. 수공업 기술을 보유한 黔首 역시 工官에 소속되어 齊民과는 다른 계통으로 관리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 점은 秦이 수공업 기술, 더 나아가 商工業을 장악하려 하였음을 의미하는 한편, 秦의 치밀하게 인력 자원을 편제하였음을 보여준다. 둘째, 진은 공전의 개간과 경작에도 많은 인력을 동원하였다. 新縣이 건설되면 해당 縣의 令은 그 이듬해부터 경지를 개간해야 했으며, 縣은 전체 보유 도예 중 일정 이상을 경작을 전담하는 도예[田徒]로 삼았다. 공전 경작에는 居貲贖債, 卒이 투입되기도 하였으나 공전 경작의 중심 인력 자원은 도예였다. 도예를 먼저 운용하는 원칙은 시설물의 건설과 물자의 운송에도 적용되었다. 黔首는 방어 시설 및 거주지‧경작지 내의 도로와 시설물을 건축하거나 수리할 의무를 지녔으며, 정기적‧비정기적으로 물자를 운송하는 徭役에 동원되었다. 그러나 이는 일정 조건을 충족하는 경우에 가능하였으며, 특히 비정기적 물자 운송의 경우 도예 인력을 먼저 이용하도록 규정하였다.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秦은 각종 육체노동 수요가 발생한 경우 도예를 최우선으로 이용하였다.
행정 잡무와 군사 업무에는 도예 일반을 광범위하게 동원하기보다 특정 인력을 이용하였다. 행정 잡무의 인력 수요는 도예로써 해결되었으나, 그중 官吏의 보좌와 심부름을 담당하는 직역(僕·養·走)에는 隸臣이 주로 동원되었고 隸妾‧城旦舂‧鬼薪白粲의 동원은 금지되었다. 이는 隸臣이 본래 가내 노예, 피예속민으로서 家나 國家의 잡무를 처리하는 역할을 담당하기 위한 목적에서 생성된 신분인 것과 밀접히 관련될 것이다. 한편 도예는 병역·요역을 부담하지 않았으므로 군사 업무는 주로 검수가 담당하였다. 秦은 각종 업무·노동의 성격에 맞추어 여러 인력 자원을 빈틈없이 조직하였으나, 이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단연 도예였다. 도예는 秦 인력 자원의 중핵을 이루어 군사 업무를 제외한 대부분의 업무·노동에 우선 동원되었다.
그러나 진 제국의 인력 편제 방식은 자립 기반을 가지지 못한 대규모의 예속 인력을 근거로 하였다. 따라서 도예를 유지하기 위해 제국은 식비, 의복비, 기타 비용을 부담하였으며, 이는 곧 커다란 재정 지출을 의미하였다. 대가를 얻지 못하는 강제 노동의 특성으로 인해 도예의 강제적 사역은 높은 생산성을 담보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종군, 건설 등 많은 인력이 필요한 戰時나 개창기에는 다수의 예속 인력이 필요하나, 제국이 난숙하여 통치가 궤도에 오르면 다수의 예속 인력은 점차 잉여 인력으로 인식되기 마련이다. 재정 부담을 줄이기 위해 秦~前漢 초기까지 赦免令이 수차례 내려졌으나, 도예는 肉刑, 無期 勞役刑으로 재생산되었으므로 사면은 근본적 대책이 될 수 없었다.
前漢 文帝 13년, 육형과 무기 노역형이 폐지되며 무기한 노역하는 도예는 소멸하였다. 문제 13년 이후에 존재한 도예는 정해진 刑期를 마치면 해방되는 유기 도예로, 후대까지 그 신분이 계승된 문제 13년 이전의 도예와는 구별되었다. 자연히 문제 13년을 기점으로 前漢의 예속 인력은 크게 감소하였다. 그러나 생산·행정 잡무·건설·운송 등의 업무·노동은 제국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였으므로, 비록 開創期보다 감소했을지언정 제국의 인력 수요는 여전히 일정 수준을 유지하였을 것이다. 이에 따라 전한 중기 이후 예속 인력 이외의 인력 자원을 병용하여 필요한 인력 수요를 충족하는 방식이 시도되었는데, 당시 병용된 인력 이용 방식은 바로 민간인력의 고용이었다.
인력을 고용하는 경우 고용주는 의식주를 비롯한 고정 비용을 치를 필요가 없었으며 필요한 기간에 필요한 수량의 인력을 이용할 수 있으므로 유휴 인력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따라서 前漢의 민간사회에는 인력 고용의 수요가 존재하고 있었는데, 전한 중기 이후 타지에 거주하는 客民이 증가하며 인력 고용의 공급도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다. 특히 전한 중기 이후 병역·요역의 대역이 이전보다 확대되며 인력 고용이 점차 보편화되어, 後漢에 이르면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이 고용 노동자로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양상이 나타났다. 과거에는 인력 고용이 육체노동에 한정되거나 타인에 고용되는 일을 다소 부끄러운 일로 간주하였다면, 후한 이후에는 식자층이 타인이나 官을 위해 고용 노동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전한 중기 이후 민간사회의 인력 고용 확대는 고용 노동자의 증가를 가능하게 하여 前漢 帝國의 민간인력 고용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출토 문서는 前漢 중기 이후 官府가 운송, 건설, 경작에 인력을 직접 고용한 사실을 보여준다. 먼저, 운송 부문의 인력 고용은 僦人의 활동에서 확인할 수 있다. 추인이란 관부에 고용되어 정기적으로 물자를 운송하는 자들을 일컫는다. 추인은 적재량을 기준으로 임금을 수령하였으며 운송 담당 吏의 관리를 받았다. 다음으로, 成帝의 능묘 건설에 고용 노동자를 투입한 기록 및 관부가 경작을 위해 고용한 민간인에 임금을 지불한 기록으로부터 건설, 경작 부문의 인력 고용을 확인할 수 있다. 게다가 전한 중기 이후에는 官吏가 보조 인력을 고용하거나 官屬이 직무를 대신할 인력을 고용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즉, 관리의 보조자나 특정 직무를 맡은 관속은 원칙상 官府가 판단한 적합한 인력으로 충당되어야 한다는 원칙이 희미해진 것을 볼 수 있다. 즉, 진~전한 초까지는 특정 직무에 특정 인력을 배치하는 체계가 존재했다면 전한 중기 이후로는 어떤 직무에 인력이 필요하다면 민간인을 적당히 고용해 인력 수요를 충당해도 무방하다는 관념이 등장한 것이다. 요약하자면 전한 중기 이후 인력 운용에서 일종의 노동 외주화가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後漢 말~三國時代 초에 이르러 전한 중기 이래의 인력 운용 방식은 변화를 맞게 되었다. 후한 중기 이후 관부의 인력 고용은 감소하고 후한 말기에 이르면 직역마다 인력을 편제하는 현상이 뚜렷이 나타난다. 官府의 고용이 감소하고 인력의 재장악이 시도된 배경으로는 후한의 재정 악화, 고용 노동의 약점, 하급 행정 인력의 수요 증대, 그리고 三國의 패권 경쟁을 들 수 있다. 특히 본 연구는 고용 노동의 약점과 기층 행정 인력에 대한 수요를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하였다. 먼저, 인력의 고용은 경제적으로는 효율적이나, 使役의 편의성 및 업무의 안정성이 낮다는 단점을 지녔다. 다음으로, 하급 행정 인력의 수요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전한 말 이후 郡 기능의 확대로 다수의 하급 행정 인력이 필요해졌으나 당시 사회에 만연한 하급 행정 인력에 대한 천시 풍조로 인해 식자층이나 재지 유력자는 하급 행정 인력이 되는 것을 기피하였다. 그러나 행정 인력을 충원하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後漢은 강제적 수단과 임시 방법을 동원하여 하급 관리 혹은 그보다 하위의 행정 잡역 담당자를 충원하려 하였다. 즉, 인력을 유상으로 이용하는 대신 장악할 수 있는 인력을 가능한 만큼 장악하는 再 내주화가 등장한 것이다.
후한 말~삼국 초 인력의 편제 양상은 走馬樓吳簡과 문헌 사료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그 특징은 戶 단위로 인력을 장악함으로써 해당 호에 특정 업무를 강제, 세습시키는 것이다. 走馬樓吳簡 중 里 집계 기록은 50개의 호로 구성된 里에 대한 종합적 정보를 담고 있는데, 1개의 里는 일반 요역을 담당하는 호[應役戶], 특수 직역을 담당하는 호, 免役戶로 구성되었다. 특수 직역 호의 직역은 호의 구성원에도 부과되었고 후대까지 세습되었으며,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국가의 각종 업무(관영수공업·둔전 경작·운송·관부 잡역)에 동원되는 호이다. 이 戶는 주로 육체노동에 종사하였는데 수공업이나 운송 등 특정 기술이 필요한 직무에는 이를 전담할 수 있는 기술자를 배치하였으며 경작이나 관부의 잡역에는 주로 주로 관부 소속의 예속민인 客, 叛走한 전력이 있는 자, 빈곤한 자를 투입하였다. 두 번째는 吏·卒 호이다. 吏·卒은 하급의 행정 담당 인력 자원으로서 행정 혹은 군사 업무에 종사하였는데, 吏·卒의 남성 가족은 행정 혹은 군사 업무를 담당할 수 있는 일종의 예비군으로 간주되었다. 이들은 특수한 세금인 限米를 납부하였고 전쟁에 종군하였으며 정식의 吏나 卒이 되지 않은 상태로 그 職을 임시로 수행하는 給吏, 給卒의 의무를 지니고 있었다. 吏·卒의 남성 가족의 현황은 郡, 縣으로 보고되었고 질병에 걸리거나 도망을 친 경우에도 해당 호에 부과된 의무는 사라지지 않았다.
秦~三國時期의 인력 편제 방식은 예속 인력 이용(내주화)→인력 고용(외주화)→戶를 이용한 民의 예속과 사역(再 내주화)의 과정으로 요약할 수 있다.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국가의 인력 활용 방식은 해당 시기 국가권력의 필요에 따라 결정되었으며, 어떤 시기의 인력 이용 방식은 당대의 상황뿐 아니라 이전 시기로부터 이어져 온 인력 이용 방식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The effective management of manpower is pivotal in creating and maintaining power. The rulers of ancient empires in China were aware of this fact and focused on organizing the manpower in their empires early on. They assigned the appropriate manpower to each area of production, administration, construction, and transportation to govern their vast lands and many subjects effectively. As the number and types of available manpower were affected by political, economic, and social conditions, the management of manpower in ancient Chinese empires changed by time. It was also closely related to the governing ideologies of the states. This study examined how the management methods of manpower changed from the Warring States Period to the Three Kingdoms Period in ancient China. Chapters I, II, and III of this paper each examined the following three periods in China: the Warring States Period, the reign of Emperor Wen (文帝) of the Former Han dynasty, and the end of the Later Han dynasty. Qin's management methods of assuming complete control over its manpower changed dramatically after the thirteenth year of Emperor Wen's reign. Later, the state began to "outsource" manpower, while "re-insourcing," the reorganization of manpower, began the end of the Later Han dynasty."
The Qin dynasty set the tasks and labor essential for state management and assigned State-owned labor forces in accordance with the characteristics of each task or labor. An analysis of the administrative documents and law during the Qin dynasty showed that there were six types of essential tasks and labor: the state-owned handicraft industry, farming, administrative chores, military tasks, construction, and transportation. The Qin government assigned manpower to the tasks mentioned above, according to laborers' labor capacity, which was based on the laborers' social status, sex, age, and physical fitness.
State slaves were assigned to work in the state-owned handicraft industry, farm state-owned lands, and transport goods. When there was a deficiency of state slaves, and more manpower was needed, soldiers and peasants were drafted. First, in most parts, manpower put to work in the state-owned handicraft industry consisted of workers with skills. State slaves with hand-craftsmanship were attached to state offices and classified as artisans even after being freed. It could be presumed that peasants with hand craftsmanship were also attached to state offices and were managed under a system different from the general public, which showed how the Qin government aimed to control hand-craftsmanship and industry in extension, the trade, and the industry. At the same time, this showed how meticulous the Qin government was in managing its manpower. Second, the Qin dynasty also mobilized a considerable amount of State-owned labor forces for cultivating and farming state-owned land. While some soldiers were also mobilized, the state slaves were central as manpower for farming the state-owned land. State slaves were also mobilized for most of the construction works and the transportation of goods. Peasants were obligated to construct or fix fortifications and infrastructures in their hometowns and farming lands. They also had to participate in statute labor by transporting goods on a regular and irregular basis. However, this was only possible when certain conditions were met, and the law stipulated that the state slaves should be used first in the case of irregular transportation of goods. Such examples showed that the Qin dynasty prioritized using its state slaves when demands for physical labor arose.
For administrative tasks and military projects, the Qin government chose to use specific manpower instead of extensively mobilizing its state slaves. Although state slaves were able to meet the labor demand for administrative tasks, only the Lichen (隸臣) and no other state slaves were allowed to serve as assistants to the officials or run errands. This was because the Lichen was a social class created for household slaves or servants who were in charge of menial tasks for the state. Since the state slaves did not have to serve in the military or take part in any statute labor, the military tasks were assigned to the peasants. While the Qin government was meticulous in its planning of manpower by the characteristics of the tasks and labor, the state slaves accounted for the most substantial portion of its manpower. State slaves were at the core of the Qin manpower and were the first to be mobilized for most tasks except for the military projects.
However, Qin's method of managing its manpower was fundamentally based on the subjugated class that did not have any basis for independence. The state had to pay for the food, clothing, and other expenses to maintain the state slaves, which led to higher government expenditure. Because statute labor did not yield any compensation, the high productivity of the forced labor provided by the state slaves could not always be guaranteed. Moreover, while slave labor was needed during wartime or at the beginning of the dynasty, when more manpower was needed for the war campaigns and construction works, state slaves became increasingly redundant as the regime became stable. A number of decrees of amnesty were issued from the Qin dynasty to the early days of the Former Han dynasty to alleviate the financial burden. However, amnesty could not become the solution for reducing the number of state slaves as long as the punishments of physical mutilation or compulsory labor, which reproduced state slaves, were imposed.
As physical mutilation and compulsory labor were abolished as punishments during Year 13 (BCE 167) of Emperor Wen's reign during the Former Han dynasty, permanent state slaves disappeared. The state slaves that existed after Year 13 of Emperor Wen's reign served as state slaves for a limited time and received amnesty after they completed their time. They were distinguished from the state slaves that existed before Year 13 of Emperor Wen's reign. Manpower controlled by the Former Han naturally dropped after the change in the state policy. However, labor, including production, administration, menial tasks, construction, and transportation, was essential to maintain the empire. It could thus be presumed that the demand for manpower maintained a certain level that was slightly lower than that at the beginning of the new empire. After the mid-Former Han period, the Han government attempted to meet the demand for labor by employing commoners instead of using state slave labor.
Employers did not have to cover the fixed costs of clothing, feeding, and housing for their slaves when they employed commoners. They were able to use as much manpower they needed when necessary, thereby minimizing the possibility of the idle labor force. The demand for employment in the commoner society during the Former Han dynasty led to a rise in the number of migrants who left their hometowns, which had helped maintain the supply of manpower. After the mid-Former Han period, employment became more common as more people began to employ agents for their military and compulsory labor services. By the Late-Former Han period, different types of people were working as employees in various fields. The expansion of employed labor in commoner society after the mid-Former Han period led to a rise in the number of employed workers. It also affected the state's decision to employ commoners for its projects.
Excavated documents showed that after the mid-Former Han period, government offices were directly employing manpower for transportation, construction, and farming. First, evidence for employment in the transportation sector could be found in the activities of the Jiuren (僦人). Jiuren refers to the people who were employed by government offices and regularly transported goods. They received their salaries by the amount of load they delivered and were managed by public officials. Records of using employed labor to build the emperor's tomb and payrolls for commoners who were employed by government offices for farming showed that commoners were employed for construction and farming projects. After the mid-Former Han period, public officials began to employ assistants, and public assistants also began to hire labor to work on their behalf. The principle that public assistant, whose main tasks were to serve as assistants or specialize in specific tasks, should be filled in by "suitable personnel" vetted by the government office had faded away. While there had been a system for allocating specific personnel to certain tasks until the Qin dynasty and the Early-Former Han dynasty, opinions changed after the mid-Former Han period. More officials believed that they could employ commoners for specific posts to meet the labor demand whenever necessary. A type of labor "outsourcing" began to appear after the mid-Former Han period.
The management of manpower established in the mid-Former Han period changed at the end of the Late Han dynasty and the beginning of the Three Kingdoms Period. The employment rate of government offices decreased after the mid-Later Han period, and at the end of the Later Han dynasty, manpower was organized through compulsory labor tasks again. The dip in government employment and the new attempts made to reclaim the manpower may have been caused by the worsening financial condition of the Later Han dynasty, the shortcomings of employed labor, the increasing demand for low-level administrative workers, and the rivalry between the Three Kingdoms. This paper focused on the shortcomings of employed labor and the demand for low-level administrative workers. First, while the employment of manpower was efficient, it was more inconvenient for the state to assign tasks, and the continuity of work was also slow. Next, the demand for low-level administrative workers also affected the change. After the Late-Former Han period, the functions of the Jun (郡) were expanded, thereby increasing the demand for much low-level administrative manpower. However, few of the literati or members of influential families applied for administrative positions as the low-level administrative workers during the era were treated with disdain. With no choice but to staff the administrative positions, the Later Han government resorted to forceful measures and temporary means to fill low-level public posts or the lower administrative positions. Instead of using manpower at a cost, the government began to take control of as much manpower as possible through "re-insourcing."
The management of manpower from the Late-Later Han dynasty to the early Three Kingdoms Period could be found in the Zoumalouwujian (走馬樓吳簡) and other historical documents. The records confirmed that the state took full control of its manpower by each household and forced each household to take part in a specific task and to pass it on within the household. There were mainly two types of households assigned with particular types of labor. First, some households were assigned various government-related tasks (state-owned handicraft industry, farming of state-owned lands, transportation of goods, menial labor in government offices). These households mainly engaged in physical labor, and skilled workers were assigned to tasks that require specific skills, such as the handicraft industry and transportation. For farming and menial labor in government offices, the state used Ke(客), who were mostly owned by government offices, runaways, and paupers. Second, some households served their duties as local administrative workers or soldiers. They became part of the low-level administrative manpower and engaged in administrative or military tasks. The male family members of these households were considered reservists who could work on administrative or military tasks. The brothers or sons of administrative workers paid a different type of tax, participated in wars, and were obligated to perform their duties as administrative workers even when they were not formally appointed. The current conditions of families with administrative duties were continuously reported to the state, and the duties assigned to each household did not disappear even when they turned ill or ran away.
The management of manpower from the Qin dynasty to the Three Kingdoms Period could be summed up as follows: the process of "utilizing state-owned manpower (insourcing) → employment (outsourcing) → controlling and assigning duties by household (re-insourcing)." This paper found that the state authority's demand determined its method of using its manpower. This paper further confirmed that the manpower management method of a specific period was influenced not only by the situations of the time but also by the management method used during the previous era.
Language
kor
URI
https://hdl.handle.net/10371/170574

http://dcollection.snu.ac.kr/common/orgView/000000162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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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ears in Collections:
College of Humanities (인문대학)Asian History (동양사학과)Theses (Ph.D. / Sc.D._동양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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