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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末 淸初 海上勢力의 浮沈과 國家權力의 對應
he Rise and Fall of Sea Powers and the Correspondence of State Powers from Late Ming to Early Q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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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채경수
Advisor
구범진
Issue Date
2020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Keywords
海禁後期倭寇동아시아 해역명 제국스페인 제국VOC정씨세력海澄(月港)安海澎湖臺灣大員(젤란디아)마닐라마카오바타비아王直鄭芝龍鄭成功Maritime Ban(Haijin 海禁)Late Wokou(Houqi-wokou 後期倭寇)East Asian Seasthe Ming empirethe Spain Empirethe Zheng regimeHaicheng(Moon Harbor)AnhaiPenghuTaiwanDayuan(Zeelandia)ManilaMacaoBataviaWang ZhiZheng Zhi-longZheng Cheng-gong
Description
학위논문 (박사) -- 서울대학교 대학원 : 인문대학 동양사학과, 2020. 8. 구범진.
Abstract
본고는 명말 청초 동아시아 해양사를 해상세력과 중국 국가권력 간의 상호작용이라는 시각에서 분석하였다. 이 시기에는 이른바 글로벌 은 경제가 형성되기 시작하여 아메리카 대륙과 일본에서 생산된 은이 해로를 통해 세계 각지로 전해졌다. 세계 은의 배수구였던 중국은 우수한 상품 생산 공급 능력과 은에 대한 높은 수요를 바탕으로 외부세계로부터 막대한 양의 은을 빨아들였다. 당시 동아시아 해상 세계는 매우 수익성이 높고 큰 규모의 교역이 이뤄지던 공간이었기 때문에 많은 세력이 이곳을 차지하기 위해 각축을 벌였다. 여러 유럽 세력의 경쟁적 진출은 그 대표적 예시이다. 선발주자 포르투갈과 스페인, 뒤이어 진출한 네덜란드와 영국은 이 해역의 패권을 두고 치열한 경쟁을 펼쳤다. 유력 현지 세력과의 우호적인 관계 설정은 이들 사업의 성패를 가르는 핵심적인 요소였다.
그동안 중국의 국가권력은 이 활력 넘치는 국제교역의 장을 저해하는 대표적 장애물로 인식되었다. 명・청 제국은 모두 해금으로 대변되는 강력한 해상통제 정책을 시행했고, 이는 두 국가의 내륙 지향성을 상징하는 조치로 여겨졌다. 이상의 시각에서 이 시기 국제무대에서 중국 측 주인공은 국가권력이 아니라 그 통제에서 벗어난 민간 밀무역 세력이었다. 그러나 최근의 많은 연구는 이러한 고전적 구도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으며 여러 가지 유의미한 관점의 변화를 이룩해냈다. 명조 互市體制에 대한 관심, 정씨세력에 대한 새로운 인식, 청 제국의 해양 개방성에 대한 주목 등이 대표적 변화이다. 다만 여전히 충분한 분석이 이뤄지지 않은 영역이 있다. 바로 말기 명 제국의 해상세력에 대한 대응이다. 이 시기 명조 국가권력의 동향은 유럽 세력이나 밀무역 집단의 그것에 비해 매우 간략하고 또 모호하게 처리되는 경향이 있다. 이로 인해 발생한 정보의 공백을 메우는 작업은 해당 역사의 서사를 한층 풍부하게 만들 것이다.
후기왜구 문제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명조는 오랫동안 고수해 왔던 두 가지 해상정책을 전환하였다. 군사적 차원에서는 민간의 군사 자원을 동원하여 전통적 군사동원 체제인 衛所制를 통해 양질의 병력을 충분히 동원할 수 없는 상황을 극복하려 했다. 민병의 적극적 활용은 해상 안보 불안의 원흉인 해적 집단을 명군으로 편입하는 이른바 以賊攻賊 정책으로 귀결되었다. 초기에는 임시방편의 성격이 강했지만, 해상 안보의 위협이 계속해서 증가함에 따라 以賊攻賊 정책에 대한 명조의 의존성은 점점 더 강해졌다. 정지룡은 이런 흐름의 마지막을 장식한 존재였다. 정치적 차원에서는 허가제 무역이 부분적으로 해금-조공체제의 기능을 대체했다. 해징 개항은 연해 지역민과 해상 안보 위협 세력의 결탁 방지를 목표로 하는 정책이었으며, 그 방점은 해외 무역의 활성화나 세수의 확보가 아니라 생계 보장을 통한 연해 지역 안정화에 찍혀 있었다.
해징-마닐라 무역 네트워크는 아메리카 대륙의 은과 중국의 상품이 직접 연결되는 통로로 기능하면서 매우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하지만 이를 둘러싸고 벌어진 다양한 곡절은 이 교역망의 활성화가 순수한 상업적 요소에 의해서만 추동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시사한다. 마닐라가 명과 스페인이라는 두 거대 제국의 유일한 접점이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당시 스페인 제국의 팽창적 야욕은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악명이 자자했으나 명에 대해서는 이를 직접 드러낸 바가 없었다. 더구나 명과 스페인은 초기 접촉 단계에서 중국계 해적을 상대로 일종의 공동 군사작전을 펼치기도 했다. 이로 인해 명조는 전통적 조공국인 呂宋을 정복하며 등장한 스페인을 안보상의 위협으로 판단하지 않았다. 이는 과거 포르투갈의 말라카 정복에 대한 대응과는 사뭇 다른 양상이었다. 해징-마닐라 무역 네트워크는 임진왜란이나 마닐라에서 일어난 중국인 학살 사건과 같은 심각한 안보 이슈 속에서도 계속 유지되었다. 이는 물론 해외 무역을 열망하는 연해 지역 상인들의 적극적 로비와 이에 대한 개해 성향 현지 관료들의 지지가 이룬 성과였다. 하지만 명조 중앙에 허가제 무역의 안보상 효능감과 스페인-마닐라를 신뢰하는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았다면 공식 무역의 지속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17세기 초 동아시아 해역에 진출한 네덜란드 동인도(VOC)의 사례는 명조가 안보상 위협으로 판단된 유럽 세력에게 어떻게 대응했는지 분명하게 보여준다. VOC는 1604년 명조와 교역 협상을 최초로 시도했지만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물러났다. 18년이 지난 후 VOC는 두 번째 협상을 시도했다. 그러나 당시 VOC에 대한 중국 측의 인상은 매우 나빴다. 중국 측은 VOC를 왜구에 버금가는 안보 위협으로 간주했다. 이는 VOC의 최근 행적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1610년대 말 VOC는 스페인에 타격을 입히기 위해 여러 차례 마닐라를 봉쇄했지만, 이곳을 왕래하던 중국 상선이 최대 피해자가 되었다. VOC의 입장에서 이는 스페인 제국의 역내 기득권을 분쇄하기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었겠지만, 그들에게 위해를 당한 중국 측에 쌓인 악명 역시 불가피한 대가였다. 명조의 입장에서 VOC의 팽호 군도 점령은 그들의 잠재적 위험성이 현실화된 사건이었다. VOC는 팽호를 협상 카드로 한 무역 협상을 진행하고자 했으나 명 측은 핵심 군사 거점을 무단 점거한 적과는 어떠한 협상도 할 생각이 없었다. 복건순무 남거익은 군사적 수단을 대대적으로 동원하여 침략자를 팽호에서 축출했다. VOC는 이후에도 명과의 공식 무역 창구를 마련하려는 노력을 계속했지만, 끝내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1610년대 후반 복건순무 황승현은 해방 개혁을 추진했다. 이 개혁은 군비 강화에 以賊攻賊 정책을 사용했다. 개혁의 성과는 VOC의 팽호 점거를 저지하는 과정에서 나타났지만 이로 인한 부작용은 훨씬 나중에 드러났다. VOC 사태에서 두각을 드러내 복건총병이 된 유자고가 부작용의 중심에 있었다. 그는 해적 집단을 수하로 포섭하는 방식으로 안보 문제를 해결했고, 포섭된 해적 집단들은 그를 뒷배 삼아 형성한 밀무역 카르텔을 통해 대만에 있는 VOC와의 무역을 독식했다. 이런 상황에 극심한 기근까지 더해지면서 민남 지역 경제는 도탄에 빠졌다. 복건 최대 해적 집단의 새로운 수장인 정지룡은 이 상황을 미약한 자신의 리더십을 강화하고 조직을 성장시키는 동력으로 활용했다. 유자고는 VOC의 힘을 빌려 정지룡을 제거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그 여파로 그동안의 비리가 드러나서 탄핵당했다. 유자고의 실패는 그 자신의 무능과 부패의 결과였으나 동시에 以賊攻賊 정책의 한계가 드러난 것이기도 했다.
명조는 다시 한번 以賊攻賊 정책을 채택해서 정지룡 집단을 포섭하여 해방에 동원하였다. 이 과정에서 정지룡의 휘하 세력 대부분은 그를 떠나 해적활동을 재개했지만, 정지룡은 휘하에 소수의 잔존 인원을 중심으로 조직을 재건하는 데 성공했다. 새로운 정지룡 집단은 명조 국가권력과 강하게 결합함으로써 안정적으로 성장했다. 많은 이들이 정지룡 집단의 충성심과 군사적 가치에 의문을 제기했지만 정지룡 집단은 여러 차례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움으로써 명 조정에 자신의 군사적 가치를 입증해냈다. 명조의 마지막 10년 동안 정지룡 집단은 복건 지역의 군사・경제적 실권을 장악한 존재로 거듭났고, 그 근거지 안해는 쇠락한 공식 무역항 해징을 대신하는 해외 무역 창구로 기능했다. 중앙 조정의 일부 유력 관료는 정지룡의 밀무역 행태를 비난하는 대신 그의 역량에 기댄 개해 정책을 주장했다. 이처럼 정지룡 집단은 명조 국가권력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명 멸망 후 자연스럽게 남명정권의 핵심적 기반이 되었다. 정지룡은 청 제국이라는 새롭게 떠오르는 국가권력에 기생하려 했지만, 그의 조직은 그를 따르는 대신 명 제국의 정치적 자산을 이용하며 독자 세력화를 추진하는 그의 아들 정성공을 구심점으로 결집했다. 정씨세력은 반청활동의 최후의 보루가 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복건 지역민의 지지를 얻어냈다.
홍무제 주원장은 위소와 해금을 두 축으로 하는 강도 높은 해상통제 정책을 추진했다. 그의 정책 기조는 해상 안보를 최우선 과제로 삼는 것이었다. 홍무제의 후계자들은 대체로 그가 강조한 바와 같이 국가를 그가 그린 청사진에 따라 운용해왔다. 그러나 가정 말 후기왜구 사태는 홍무제식 해상통제가 한계에 봉착했음을 분명히 드러냈다. 명조는 정책의 부분적 전환을 통해 당면한 안보 문제를 해결해나갔다. 정책 전환을 통해 매우 이상적인 결과를 얻었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당시 명조가 가지고 있던 한정된 자원과 제한된 역량을 고려한다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해낸 것만으로도 충분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볼 수 있다. 상기한 정책적 전환의 최종 결과물이라 할 수 있는 정씨세력은 상당히 불안정한 우군이었지만, 그러함에도 명조를 가장 마지막까지 지키려 한 세력이었다.
This article analyzed the maritime history of East Asian Seas from the late Ming to early Qing period within the framework that the interaction between the sea powers and Chinese state powers. In this period, the so-called 'Global Silver Economy' was started to develop. The silver from America and Japan was transported all around the world through sea routes. China- 'the bottomless silver sink'- drained an enormous quantity of silver, based on the superior capability of commodity supply and high demand for silver. Since the East Asian Seas were the places where many profitable and large-scale trade took place, many groups vied to achieve the hegemony. The competitive entry of many European powers is a representative example. Portuguese and Spanish- the leading runners-, Dutch and British- the second movers- competed fiercely for these seas' supremacy. The cordial relationship with local powerhouses was a vital point of the make or break of their enterprises.
In the meantime, China's state powers have been regarded as typical obstacles against this irrepressible global trade market. Both the Ming and Qing Dynasties implemented firm sea control policy, most representatively known as the 'Maritime Ban(海禁)', which was considered the symbol of their inland orientation. In this perspective, the Chinese side's main actors in this global stage were not 'state powers', but 'the civilian smuggler groups' who broke away from the governmental control. However, many recent studies questioned this classic perspective and made several meaningful changes of viewpoint. The academic interests in 'the border trade system(互市體制)', new understandings of the Zheng regime, the attention to the maritime openness of the Qing Empire were the notable changes. Still, how the late Ming Empire dealt with maritime powers is questionable and needs to be analyzed thoughtfully. During the late Ming period, the Ming state power movements tend to be treated briefly and vaguely compared with the trace of European powers or smuggler groups. Therefore, the attempts to fill up such gaps of previous narratives will enrich the history of this space and time abundantly.
In the process of handling 'Late Wokou(後期倭寇)', the Ming Dynasty changed two long-standing maritime policies. In terms of military affairs, the Ming Dynasty used mobilizing civilian-military resources to overcome the problem of Weisuozhi(衛所制), the traditional garrison system, which could not sustain troops' required scale with quality. Active usage of the militia was traced to the policy so-called 'using pirate against pirate(以賊攻賊)' that accepting piracy groups -the main culprits of maritime security concerns- into the Ming army. In the beginning, this policy had a nature of temporary expedients, but growing maritime security concerns accelerated the Ming Dynasty's dependency on this policy. Zheng Zhi-long(鄭芝龍) was the finale of this trend. In terms of political affairs, the 'Licensed trade system' partly supplanted the function of the 'Maritime Ban-Tribute System'. The open-door policy on Haicheng(海澄) aimed to prevent collusion between the littoral residents and maritime outlaws. Naturally, the policy's focal point was not on the economic stimulation or tax revenues, but the stabilization of littoral people by securing their livelihood.
The Haicheng-Manila trade network grew extremely fast by functioning as a direct route to connect American silver and Chinese commodities. However, many complications surrounding this trade network allude that the economic factor was not the only sake lead this brisk trade boom. The fact that Manila was the only contact point of two giant empires -the Ming and Spain should not be ignored. The Spain Empire's expansion ambition was notorious in Europe and America, but Spain never revealed its aspiration against the Ming directly. Moreover, they carried out a kind of joint military operation against a Chinese piracy group at the initial contact. Thus, the Ming court did not judge the Spain Empire as a threat, even though Spain conquered Luzon -the long-standing tribute country of the Ming-. In contrast, the Ming showed a quite different reaction with Portugal, the conqueror of Malacca. The Haicheng-Manila trade network was maintained, despite the significant security issues like 'Japan invasion to Chosen' or 'the massacre against Chinese in Manila' were occurred. Of course, this was an accomplishment of successful lobbying made by the local merchants and the pro-trade officials; the local merchants were full of desire for maritime trade and the pro-trade official -mostly assigned in the littoral area- supported those local merchants. However, it was impossible to maintain licensed trade of Haicheng unless the consensus about the efficacy of licensed trade for the security concern and credibility of the Spain-Manila was being formed in the Ming court.
The VOC's case in the early 17th century showed clearly how the Ming reacted the European power, which was judged as a security threat. In 1604, the first attempt for VOC to open the official trade channel with the Ming was failed. Eighteen years later, the second attempt of negotiation was tried; however, VOC images were terrible on the Chinese side at that time. VOC was considered a security threat second only to 'Wokou'. It was due to VOC's recent actions. At the end of the 1610s, VOC blockaded Manila port several times to damage Spain, but such actions resulted in the Chinese trade vessels on and off this harbor to become the biggest victims of all. For VOC, these operations would be inevitable choices to destroy Spain's supremacy on these waters. However, at the same time, being notorious for Chinese victims was also an inevitable consequence. For the Ming court, the occupation of Penghu islands(澎湖群島) by VOC fleet was the event that actualized its potential dangerousness. VOC tried to proceed with the trade negotiation using Penghu as a bargaining chip. However, the Ming had no intention to negotiate with the 'enemy' that squatted the crucial strategic point. Fujian governor Nan Ju-yi(南居益) mobilized a large scale military force to drove the invaders out of Penghu Islands. Later, VOC kept trying to open an official trade channel with the Ming but failed in the end.
At the end of the 1610s, Fujian governor Huang Cheng-xuan(黃承玄) carried forward a coastal defense reformation. This reformation made use of the 'using pirate against pirate' policy to reinforce the defense system. The fruits of the reformation appeared in blocking the VOC's invasion to the Peng-hu islands, but the side effects revealed much later. The regional commander of Fujian Yu Zi-gao(兪咨皐), who distinguished himself through Penghu re-seizure operation, was at the center of the side effects. He solved security concerns by conciliating the piracy groups. The conciliated pirates made a smuggling cartel sponging off Yu's power, monopolized the trade with VOC in Taiwan. Due to a widespread famine overlapped in this situation, the livelihood of southern Fujian fell into distress. Zheng Zhi-long, a new leader of Fujian's biggest piracy group, used this situation as an impetus to reinforce his weak leadership and inflate the group's scale. Regional commander Yu tried to eliminate Zheng Zhi-long with the help of VOC. However, he did not just fail but lose his position for revealing his corruption in the aftermath of the fight. Yu's failure resulted from his incapacity and corruption, at the same time, the limitation of 'using pirate against pirate' policy.
The Ming court adopted 'using pirate against pirate' policy once again, conciliating the Zheng Zhi-long to use his group on the coastal defense. In this process, most of his gangs left him and restarted piracy. However, Zheng Zhi-long managed to rebuild his group, making the best use of a small number of remaining men. The new Zheng Zhi-long group developed steadily by combining with the Ming's state power. Although many authorities of the Ming called the Zheng Zhi-long group's credibility and capability in question, it proved its military value by achieving brilliant success in several rounds of battle. During the last ten years of the Ming Dynasty, Zheng Zhi-long group developed its military and economic ascendancy over the Fujian littoral area, and its stronghold Anhai(安海) functioned as the main harbor of maritime trade by replacing the declined official trading port Haicheng. Some of the influential officials of the Ming court did not blame Zheng's smuggling behavior. Instead, they claimed open sea policy relying on his capability. Like this, Zheng Zhi-long group and the Ming state power closely related to each other. That is why Zheng Zhi-long group spontaneously became the key base of the Southern Ming regimes(南明政權). Nonetheless, soon Zheng Zhi-long tried to be parasitic in alternate host -the newly emerging Qing Empire-, but instead of following him, the rest of his group rallied around his son Zheng Cheng-gong(鄭成功), who tried to make an independent power using the old Ming's political legacy. The Zheng regime was the last bastion of Anti-Qing resistance, and using such reputation earned the support of littoral people.
Hongwu emperor(洪武帝) Zhu Yuan-zhang(朱元璋) implemented a strict maritime control policy using 'Weisuozhi' and 'Maritime Ban' as two core devices. The keynote was to put maritime security as the top priority on his policy. Most of his descendants had managed the Ming empire following his blueprint just as he emphasized. However, at the end of the Jiajing(嘉靖) reign, the 'Late Wokou' situation occurred and lead to show the limitation of Hongwu style maritime control. The Ming court managed to solve urgent security concerns by some partial transitions of the maritime policy. Although it is hard to say these transitions lead to ideal results, considering the limited resources and capacity of the Ming at that time, just being able to solve the short-range problems has achieved sufficient results. The Zheng regime, the 'final product' of the policy shift mentioned above, was quite an unstable ally. Still, the Zheng regime was the last force that tried to stand for the Ming's banner.
Language
kor
URI
https://hdl.handle.net/10371/170575

http://dcollection.snu.ac.kr/common/orgView/000000163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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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lege of Humanities (인문대학)Asian History (동양사학과)Theses (Ph.D. / Sc.D._동양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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