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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관왕묘 향유의 두 양상 : Two Aspects of the Meaning of the Shrine of Guan Yu in Late Joseon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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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김지영

Issue Date
2016-12
Publisher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Citation
규장각, Vol.49 No., pp. 501-531
Keywords
관왕묘삼국지연의무묘春秋義理대의에 바탕한 忠大明義理The shrine of Guan Yuappraise to Zhou dynastyRomance of the Three Kingdomsthe temple of militarya symbol of military power based on loyalty and universal justice
Abstract
조선에서 관우를 기념하는 사당[關王廟]이 처음 생긴 것은 임진왜란 때였다. 그러나 거의 100년 동안 관우의 영험함을 빌려 개인적 복을 구하는 사람들만 즐겨찾는 장소였다. 선조가 처음 이 곳을 찾을 때 왕이 무묘에 찾아가는 예를 차용했고, 이후 국가 祀典에 포함되어 제향이 이루어졌지만 그 제향이 갖는 국가적 의미는 불확실했다. 이 장소는 숙종대에서 정조대에 이르는 동안 국가적으로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숙종은 관우를 忠義와 尊周의 아이콘으로 해석해냈다. 당시 왕조의 수복을 위해 노력하며 時勢보다는 정의正義를 중시했던 촉한을 가장 정통성이 있는 나라로 여기는 촉한정통론의 역사의식은 『삼국지연의』라는 책을 통해 조선에 더 널리 퍼졌다. 숙종은 관우의 충성심을 군주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심이 아니라 국가를 넘어서 보편적인 정의를 지향하는 차원에서 재정의했다. 관우는 단지 무력이 뛰어난 무장이 아니라 『춘추』라는 책을 즐겨 읽었던 정의로움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장수였고, 시대를 뛰어넘어 기억할 만한 武의 상징이 될 수 있었다. 영조와 정조는 관왕묘를 조선의 무묘로 정립시켰다. 숙종과 마찬가지로 관우를 형세에 굴하지 않고 오롯이 漢 왕조의 회복을 위해 몸바친 이로, 춘추 의리의 상징으로 기념했다. 무묘에서 절하는 무장들과 군사들에게 관우를 본받아 무력이 사적 이익과 權勢를 위해서가 아니라 정의로운 나라를 세우고 보전하는 데에 쓰일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숙종~정조에 이르는 시기는 군사 방면의 업적이 조선의 어느 시기보다도 두드러진 시기였다. 왕조는 의리에 바탕한 무의 상징으로 관우를 재정립시키며 그의 사당에서 조선이 생각하는 바람직한 무를 설득했다. 내부로부터 신뢰를 쌓아가는 정치로 관왕묘에서의 설득에 설득력을 더하는 일은 왕조의 몫이었다. 19세기 역사 속에서 관왕묘 의례는 지속되었지만, 관왕묘의 18세기적 상징성은 점차 희미해졌다. 관왕묘는 다시 사적인 무당집으로 변해갔고, 끝내는 국가가 스스로 관왕묘를 왕실의 안녕을 위해 맹목적으로 기도하는 장소로 만들었다. 관왕묘는 더 이상 국가의 안위와 무관한 공간으로 전락했다.
ISSN
1975-6283
Language
Korean
URI
https://hdl.handle.net/10371/174472
DOI
https://doi.org/10.22943/kyujg.2016..49.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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