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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자유주의 담론에 대한 비판적 연구, 1945~1970: 『사상계』를 중심으로
A Critical Analysis on the Liberal Discourse in Korea, 1945~1970: focused on Sasanggy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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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최민석
Advisor
정근식
Issue Date
2021-02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Keywords
『사상계』사회적 자유주의경제적 자유자유민주주의이승만박정희냉전 자유주의개발주의Sasanggyesocial liberalismeconomic libertyliberal democracyRhee SyngmanPark Chung Heecold war liberalismdevelopmentalism
Description
학위논문 (박사) -- 서울대학교 대학원 : 사회과학대학 사회학과, 2021. 2. 정근식.
Abstract
이 연구는 한국 자유주의 담론의 특징으로 권위주의 정권에 항거해 정치적 자유를 요구하는 동시에 국가 개입에 의한 균분을 주장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러한 특성은 국가를 필요악으로 간주하는 고전적 자유주의의 입장에서는 나올 수 없다. 서구에서 자유주의는 자유의 적을 새롭게 규정하면서 혁신되었다. 자유의 주적은 처음에는 국가였지만(고전적 자유주의), 20세기 초반에는 빈곤이었고(사회적 자유주의), 냉전에 접어들면서 공산주의로 변화했다(냉전 자유주의). 해방 이후 한국에서는 이 세 가지가 모두 강력한 자유의 적이었다. 그러나 빈곤으로부터의 자유를 위해 국가의 개입이 필요했고, 공산주의로부터 자유를 수호할 구심도 국가일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한국의 지식인들은 국가로부터의 자유를 주장하기보다 빈곤 탈피와 반공 투쟁을 수행할 수 있는 공정하며 강력한 국가를 요청하는 경향을 보였다. 강한 국가와 개인의 자유, 생존권을 조화시킨다는 구상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이 시기 자유주의 담론에서 공통된 것이었다.
한국에서 자유주의는 서구적 근대화의 원리로 수용되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자유주의는 현실적인 의미를 갖기 어려웠다. 일제강점기에 자유주의는 지식인들의 교양으로만 존재할 수 있었다. 특기할만한 점은 일제강점기에 지식인들이 20세기 초반 영국에서 나타난 사회적 자유주의를 습득했다는 것이다.
영국의 사회적 자유주의는 고전적 자유주의가 한계를 보이면서 태동했다. 자유주의가 약속한 정치적 권리들이 보편화된 반면, 자유방임 자본주의가 불평등을 확대하면서 자유주의 정치세력의 입지가 약화되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개인의 기회 균등을 목표로 개인과 공동체, 자유와 평등의 조화를 도모하는 사상으로서 사회적 자유주의가 나타났다. 그것이 현실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국가에 의한 재분배였다.
일제강점기에 지식으로서 수용되었던 사회적 자유주의는 해방 이후에 현실적인 국가 구상으로서 입지를 가질 수 있었다. 특히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모두에 거부감을 가졌던 지식인들에게 사회적 자유주의는 절충적 이념으로 인식되었다. 특히 중간파 지식인들을 좌우, 남북으로 양극화된 정치지형을 종합할 수 있는 사상으로서 사회적 자유주의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소개했다.
해방 정국의 중간파가 견지했던 사회적 자유주의는 전쟁 후 『사상계』에서도 지속적으로 나타났다.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기에 앞서 개인과 공동체의 상호의존성이 우선시되었고, 방향성있는 자유만이 긍정되었다. ‘진리’와 합치하는 자유만이 가치있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따라서 진리를 이해하고 있는 지식인의 역할이 중요했다. 『사상』과 『사상계』의 출발점 자체가 지식인에 의한 계몽 기획의 일환이기도 했다.
1950년대 『사상계』의 ‘자유’ 담론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는 ‘경제’였다. 『사상계』에는 사회적 자유주의에 근거해 경제적 자유를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이 지속되었다. 반면 경제적 효율성과 국가 권력의 축소를 위해 경제적 자유가 확대되어야 한다는 논의가 나타나기도 했다. 1950년대 후반 근대화를 위한 경제체제를 모색하면서 이들의 주장은 충돌하기도 하고 수렴되기도 했다. 『사상계』에서 개진된 경제체제론은 대체로 자유경제 체제의 확립을 위해 일정 기간 국가 계획이 필요하다는 방향으로 종합되는 양상을 보였다. 빈곤 탈피를 위한 국가 개입은 복지국가론에 의해 정당화되기도 했다. 물론 후진국의 입장에서 복지국가의 역할은 재분배보다는 개발에 있었다.
그러나 1960년대 총량적 경제성장이 경제적 종속과 불평등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전개되면서 국가의 도덕적 책임을 요청하는 담론이 확산되었다.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는 담론은 사회과학적 논리보다는 휴머니즘적 윤리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장준하를 비롯한 『사상계』 지식인들은 윤리적 견지에서 국가 개입을 요구했다.
서구에서 자유주의는 애초에 국가에 대한 저항 이념으로서 탄생한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자유주의 담론은 국가의 권한 축소를 요구하기보다 권력의 도덕적 사용을 요청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한국의 자유주의 담론이 고전적 자유주의에 충실하기보다 사회적 자유주의의 영향을 받은 데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지식인들은 국가 권력의 범위와 강도를 문제로 여기기보다 그것을 운영하는 통치자의 도덕적 자질을 중시했다. 박정희 정부에 항거하면서, 국가의 경제적 개입을 긍정하는 입장은 이러한 맥락에서 나올 수 있었다.
1963년 이래 『사상계』의 ‘자유’ 담론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개념은 ‘민주’였다. 『사상계』는 1963년부터 1970년 5월 “오적” 필화로 폐간될 때까지 자유민주주의의 복원을 위한 정권교체에 몰두했다. 『사상계』는 자유민주주의를 준거로 박정희 정부를 비판하고, 정권교체를 위한 동원을 촉구했다. 이 과정에서 자유민주주의는 정권교체와 동일시되기도 했다. 물론 자유민주주의 개념이 처음부터 정권교체와 연관되어 있지는 않았다. 자유민주주의는 논자마다 의미를 달리하는 모호한 개념이었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는 정치적 준거로서의 지위를 얻으면서 권위주의 정부에 대한 반대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사용될 수 있었다.
1963년부터 본격화된 『사상계』의 전환은 군사정부에 대한 장준하의 입장 선회와 그에 대한 박정희 정부의 공식적, 비공식적 탄압이 맞물리면서 증폭된 결과였다. 박정희 정부에 대한 입장차로 지식인들이 분화되면서 『사상계』의 담론은 지사적 지식인을 표방한 인사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들은 국가로부터의 자유를 요구하기보다 정권교체를 통해 양심적 통치자가 국가를 장악하는 것이 자유민주주의 회복의 관건이라고 보았다.
박정희 정부를 악으로 규정하고 전면적인 투쟁에 돌입하면서 정권교체를 위한 동원과 참여는 종교적 정의를 실천하는 일로 의미 부여되었다. 반면 현대 국가가 공동체의 통합과 생활의 안정을 위해 방대한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는 점에는 이의가 없었다. 문제는 국가를 운영하는 통치자의 양심이었다. 지식인들은 통치자의 자질이 높고 양심이 올바르다면 강한 국가가 오히려 더 많은 자유를 가져올 수 있다고 믿었다. 통치자의 성격에 따라 국가의 성격도 변화한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국가 권력의 강도를 문제 삼기보다는 정권교체에 모든 명운을 걸었다. 강한 국가에 대한 열망과 정권교체에 대한 절박감이 공존했던 것이다.
1970년대 이전까지 한국 자유주의 담론의 또 다른 특징으로 언급할 수 있는 것은 엘리트주의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지식인들은 대중을 불신하면서 계몽과 동원의 대상으로만 간주하는 성향을 지속적으로 보였다. 자유주의를 지지할 부르주아 교양 시민의 부재를 지사적 지식인의 리더십으로 대체하면서, 대중의 역할은 그에 호응하는 것으로 한정했다. 이러한 엘리트주의는 집단적 목표에 자유주의가 종속될 때 나타나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사상계』는 지식인 리더십에 순종하는 주체를 형성하고자 했다. 지식인이 지시한 공공선을 지향하는 행위만이 ‘참된 자유’로 규정되었다. 『사상계』가 강조한 정신적 개조는 공공선에 대한 각성을 의미했다. 물론 공공선은 상황 맥락에 따라 변화했다. 레지스탕스, 후진성 극복을 위한 근로의욕, 정권교체 등 『사상계』는 국면마다 다른 초점을 가진 공공선을 제시했고, 대중들의 각성을 촉구했다. 『사상계』 지식인들은 엘리트주의적 관점에서 유순한 대중을 요구했다. 그러나 현실의 대중은 그러하지 않았다.
『사상계』는 정권교체의 당위성을 설파하는 데 주력했다. 그러나 『사상계』 지식인들의 자유주의는 지식인과 학생을 넘어서는 동원 논리로 확장되지 못했다. 이는 대중의 구체적 삶의 모습에 관심을 기울이기보다 자유의 방향성을 논하며 추상적인 계몽주의로 일관한 데 기인했다. 이러한 한계는 비판적 지식인들이 민중과의 합일을 시도하는 1970년대부터 조금씩 극복되어 갈 것이었다.
This study focused on the distinct characteristic of the liberal discourse in Korea. Intellectuals who cherished liberalism protested against authoritarian rule and claimed fair distribution by state intervention at the same time. This characteristic could not be shown from the classic liberalism that regarded a state as a necessary evil. In the history of Western liberalism, ‘liberty’ was considered to be oppressed by states at first, by poverty in the early 20th century, and by communism after outbreak of Cold War. However, in Korea an authoritarian state, poverty and communism altogether threatened liberty just after the liberation from Japanese rule. A strong state was needed to fight poverty and communism. Korean intellectuals who favored liberalism desired to harmonize an impartial strong state with individual liberty and welfare. They thought that social liberalism(new liberalism) which originated from Britain would correspond to their idea.
Social liberalism was accepted by some intellectuals in Japanese ruling period, but it could not has any real meaning in colonized Korea. But later on, it would be a realistic blueprint after Korean liberation. Especially, intellectuals who refused both capitalism and communism perceived social liberalism as an idea which compromise the Left and the Right, in other words, North Korea and South Korea. This project failed but social liberalism continued after Korean War.
Intellectual discourse about social liberalism could be found on academic magazine Sasanggye which was published from 1952 to 1970. Writing articles for Sasanggye, they prioritized mutual interdependency of individual and community, and affirmed only valuable freedom that accorded with ‘veritas’. They regarded themselves as prophets and enlighteners for the public.
In 1950s, an economic system was the most important issue of the liberal discourse in Sasanggye. Based on social liberalism, arguments claiming restriction on economic freedom continued. But some intellectuals asserted that economic freedom should be enlarged for economic efficiency and reduction of state power. These conflicting opinions gradually converged in late 1950s when intellectuals sought ways to improve Korean economic structure for modernization. They concluded that a state plan was needed for the construction of more efficient economy. The state plan oriented to fight poverty was justified also by social liberalism and welfare state theory. In Korea, as an underdeveloped country, the role of welfare state was defined as rather development than redistribution.
However, as successful gross development caused inequality, intellectuals claimed that the state should guarantee existence right of the people. Intellectuals who resisted Park Chung Hee demanded the intervention of a moral state. It was social liberalism that affected intellectuals asking a moral state. They took a strong state for granted but criticized Park’s brutal morality.
However, Sasanggye coterie tried to mobilize masses to achieve a turnover of political power. Liberal democracy was the criteria in the discourse of mobilization and criticism. Defiant intellectuals thought that an authoritarian ruler, Park must be removed for the restoration of liberal democracy. On the other hand, liberal democracy was needed for mass mobilization. There was an ambiguous consensus about what liberal democracy really meant, but it was regarded as the most urgent objective. Resisting Park’s long-term seizure of power, intellectuals regarded a political turnover as equivalent as liberal democracy.
After Sasanggye intellectuals diabolized Park’s government, mobilization and participation for a political turnover was justified in religious mood. Yet, they had conviction that modern states should take massive roles for the integration of the nation and the welfare of individuals. Conscience and morality of the ruler mattered. They thought that the stronger the state was, the freer the individuals, under the moral government control. The nature of a state depended on the character of a ruler. Intellectuals had an aspiration for a strong state and a political turnover at the same time. That is the reason that Sasanggye coterie were absorbed in mass mobilization and indifferent to the intensity of state power.
Language
kor
URI
https://hdl.handle.net/10371/175608

https://dcollection.snu.ac.kr/common/orgView/000000165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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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ears in Collections:
College of Social Sciences (사회과학대학)Dept. of Sociology (사회학과)Theses (Ph.D. / Sc.D._사회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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