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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대 궁궐 儀禮空間 정비의 지향 : The Ritual Space in Royal Palaces under Goj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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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이민아

Advisor
오수창
Issue Date
2021-02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Keywords
고종숙종궁궐의례공간어진봉안처도서수장처제천의례Gojong(高宗)Sukjong(肅宗)palaceritual spaceKing's portrait
Description
학위논문 (박사) -- 서울대학교 대학원 : 인문대학 국사학과, 2021. 2. 오수창.
Abstract
Palaces in the era of Joseon were the central spaces in which Confucian ritual was held. The ritual space in the inside and outside of the palaces had been changed by each period. After Sukjong, three changes occurred. First, Daibodan(大報壇) in which the ancestral rites for the emperor of the Ming Dynasty were performed was built. Second, Seonwonjeon(璿源殿) in which those for the late kings(先王) were held by consecrating their portraits was constructed. Third, Kyujanggak(奎章閣), a palatial residence in which ritual was implemented by enshrining a living King's portrait.
Such spaces were not those for the traditional Confucian ritual. After Sukjong created new spaces with his strong charisma, Yeongjo and Jeongjo reinforced such ritual spaces with the cause of the succession of ancestors. In particular, the ritual spaces in palaces were further stressed, after Gojong who had weak legitimacy acceded to the throne.
When rebuilding Gyeongbokgung Palace(景福宮), Heungseon Daeweongun(興宣大院君) reinforced the ritual ceremony spaces including Seonwonjeon(璿源殿), around the royal family bureau(宗親府). Gojong also attempted to strengthen his authority by reinforcing the memorial spaces for the decedent, such as Seonwonjeon(璿源殿) and Kyeongsojeon(景昭殿) in Gyeongungung Palace(慶運宮). He ordered to store the portraits and books of kings by constructing new buildings in Gyeongbokgung Palace(景福宮) and Changdeokgung Palace(昌德宮), with the model of Kyujanggak(奎章閣). The ritual ceremony held in Daibodan(大報壇) led to the construction of Wongudan(圜丘壇), the space for the rituals of sacrifice to the heaven, which was used to show off the features of the empire to the public outside the palaces during The Great Han Empire.
In 1902, a variety of events were planned to display the status of the traditional monarch and the modern empire, for commemorating the 40th anniversary of Gojong's enthronement and his 51th birthday. He tried to reinforce the status of the monarch and the country, by renovating the ritual spaces in palaces. He, however, spent too much money on renovating ritual spaces for ostentation, when the Japanese invasion was accelerated, so his attempt was failed. Nonetheless, the renovation of ritual spaces in palaces under Gojong has an implication, in that it clearly shows the character of political culture at that time. The palace ritual space, which has emerged amid the cracks of Confucian rituals since the 18th century, contains the intention of the monarch, who sought to become the central point of the country by raising his status at the end of the 19th century and the beginning of the 20th century.
조선시대 궁궐은 유교적 국가의례가 시행되는 중심공간이었다. 궁궐 안팎의 의례공간은 시기에 따라 변화했다. 숙종대 이후 궁궐 의례공간에 주목할 만한 변화 세 가지가 나타났다. 첫째, 궁궐 내 명 황제를 제향하기 위한 길례 공간인 대보단이 설치되었다. 성리학적 의식이 강화되면서 대명의리의 상징공간으로 설치된 대보단은 역설적이게도 기존의 천자국-제후국이라는 유교질서에 균열을 가하는 공간이었다. 조선의 국왕이 천자인 명나라 황제에게 제사를 지내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둘째, 선왕의 어진에 제사를 지내는 공간인 선원전이 건립되었다. 숙종대 이전의 선원전은 선왕의 어진을 봉안하는 공간이었을 뿐 제향공간은 아니었다. 숙종이 자신의 어진에 제향할 것을 유언으로 남기면서 선원전은 궁궐 내 새로운 제향공간이 되었다. 신주에 영혼이 깃든다는 정통 유교식 관념에 따르면 영정의 제사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영정은 신주보다 훨씬 더 감각적이고 원초적인 기억장치였다. 이를 통해 국왕은 자신의 위상을 높일 수 있었다. 셋째, 현왕의 어진을 봉안한 전각이 등장했다. 숙종대 강화부에 장녕전이 건립된 후 영조는 숙종 뒤를 이어 강화부 만녕전과 경희궁 태녕전에 자신의 어진을 봉안하게 하였다. 정조는 창덕궁 후원에 규장각을 세우고, 선왕의 유품과 함께 자신의 어진을 봉안했다. 이후 규장각은 정조의 친위기구로 성장했다. 현왕 어진 봉안 공간은 성리학적 의례에 부합하는 공간이 아니었으며, 현왕의 위상을 높이고 과시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이와 같이 대보단, 선원전, 규장각은 숙종대 이후 새롭게 등장한 궁궐 의례공간으로 모두 정통 유교식 의례와 다른 공간이었다. 강력한 카리스마로 새로운 공간을 창출한 숙종대 이후 영조와 정조는 선왕의 사업을 계승한다는 명분으로 이와 같은 의례공간을 강화하였다. 특히 정통성이 취약한 고종이 즉위한 이후 궁궐 의례공간은 더욱 강조되었다. 고종대 궁궐 의례공간은 선대 계승을 표방하고 변화·확장되었으며 주체와 시기에 따라 그 내용이 달라졌다.
고종대 궁궐 의례공간의 지향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경복궁은 종친부를 중심으로 권력을 재편하고자 했던 흥선대원군의 의도에 따라 중건되었다. 흥선대원군은 경복궁을 중건할 때 종친부 내에 先王의 眞殿 천한전을 새롭게 조성하였으며, 종친부는 광화문 앞 의정부·삼군부와 경복궁을 사이에 두고 긴밀하게 연결되어 하나의 권역을 형성했다. 중건 경복궁에서 주목할 만한 특징은 빈전과 혼전 규모가 매우 확대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종친이 주도하는 의례공간을 더욱 강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고종 역시 제례공간에 주목하였다. 갑오개혁으로 국가의 제사기능이 축소되고, 고종의 권한도 크게 약화되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갔다가 경운궁으로 이어했다. 경운궁을 새롭게 조성할 때 명성황후의 빈전인 경소전과 선왕의 어진을 봉안한 선원전 건립이 우선되었다. 또 선대를 제사하기 위한 공간을 영성문 내에 새롭게 마련하였다. 이는 이후 전주 조경단 설치, 삼척 준경묘와 영경묘 정비, 개성 목청전 건립, 경모궁 종묘 부묘 등 궁궐 밖으로 이어졌다.
고종이 주목했던 현왕 어진봉안처 조성과 봉심의례 시행 역시 숙종대 이후 나타난 새로운 흐름이었다. 고종은 규장각 권역의 주합루를 모범으로 한 어진봉안처인 건청궁 건립을 통해 친정의지를 드러냈다. 고종이 移御와 還御를 반복하면서도 궁궐 내에 영건했던 건청궁, 관문각, 집옥재는 모두 규장각을 모범으로 하는 건물이었다. 이들 건물은 현왕 어진봉안처를 중심으로 주변에 도서수장처를 배치했다는 특징을 갖는다. 대한제국 수립 이후 설립된 수옥헌 역시 규장각을 모범으로 한 경운궁 최초의 양관이었다. 이후 경운궁 내에 고종의 개혁을 상징하는 법규교정소와 원수부를 비롯한 다양한 서양식 건물이 들어섰다. 평양의 이궁 풍경궁에도 황제의 어진을 봉안함으로써 고종은 황제의 위상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다.
제천의례 공간 역시 황제의 위상을 높일 수 있는 대표적인 상징물이었다. 고종이 원구단에서 황제로 즉위하기 전까지 조선에서 공식적으로 제천의례가 시행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숙종대 이래 대보단은 명 황실을 대상으로 한 제례로서 제천의례의 의미를 부여받았다. 흥선대원군은 만동묘를 철폐하고 대보단을 강화함으로써 명 황실에 제례를 시행하는 주체를 국왕으로 한정하였으며, 혜화문 밖에 성단을 건설하여 하늘에 제사지낼 수 있는 통로를 마련했다. 고종 친정 이후 대보단과 같은 형식으로 만동묘를 복원함으로써 명 황실에 대한 제향공간을 지방으로 확장하였다. 명 황실 계승의식은 대한제국 수립 때 원구단 의례에서 명나라 의례를 차용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원구단 의례는 전통적 황제국의 면모를 보임과 동시에 근대제국의 위상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1902년 고종 즉위 40년과 보령 51세를 맞아하여 전통적 군주의 위상을 높이면서 국제사회에 제국의 위상을 드러내기 위한 다양한 행사를 벌였다. 구체적으로 기로소 입소와 어진 도사, 즉위 기념식이 그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궁궐 내 중화전 영건 및 운교의 가설, 돈덕전 건립, 경희궁 정비, 원구단 및 탑골공원 정비 등 다양한 토목공사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1904년 경운궁 대화재로 경운궁 중심부가 대부분 전소되었다. 화재의 피해를 입지 않은 수옥헌은 저항의 의미를 담아 중명전으로 변화하였고, 외교를 통한 국권회복을 기원하며 대안문이라는 전각명은 대한문으로 변경하였다. 전각명 변경만으로 저항의지를 나타낸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고종은 밀사 파견을 통해 유럽국가와 긴밀히 접촉하면서 일본의 침략에 맞섰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모두 실패로 끝났다.
고종대 궁궐 의례공간 정비가 고종대 시대적 과제였던 근대국가 수립과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방어하는데 효과적이었다고 볼 수 없다. 내실 있는 체제 개혁과 내부 역량 결집이 뒷받침 되지 않는 상태에서 의례의 확대와 관련된 공간 창출만으로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기는 어렵다. 더구나 가시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재정적 부담이 가중되었음도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종대 궁궐 의례공간의 정비는 당시 정치문화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 특히 18세기 이후 유교적 의례의 균열 속에서 새롭게 등장한 궁궐 의례공간은, 19세기 말, 20세기 초 제국을 세워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국가의 위상을 높이려 했던 고종의 지향이 담긴 가시적 상징물들로 이어졌다. 이는 한마디로 조선 후기의 맥락 속에서 근대적 국가를 지향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Language
kor
URI
https://hdl.handle.net/10371/175748

https://dcollection.snu.ac.kr/common/orgView/000000165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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