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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河・鳥羽院政期 院의 對外貿易과 院近臣 : 白河・鳥羽院政期 院の対外貿易と院近臣: 『長秋記』長承二年八月十三日記事を中心に
『長秋記』 長承 2년 8월 13일 기사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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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이소현

Advisor
박수철
Issue Date
2021-02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Keywords
원정(院政)원근신(院近臣)다자이후(大宰府)대외무역(対外貿易)간자키 장원(神崎庄)헤이시(平氏)院政院近臣大宰府対外貿易神崎庄平氏
Description
학위논문 (석사) -- 서울대학교 대학원 : 인문대학 동양사학과, 2021. 2. 박수철.
Abstract
『長秋記』長承二年八月十三日の記事は院の権威を掲げた神崎庄と古代管理貿易体制の中心機構である大宰府との間で起きた貿易権紛争を記録した。神崎庄は九州西北部の肥前国神崎郡にあった沿海庄園で、九世紀頃より院より院へ相伝してきた本所権の強い院領庄園であった。長承二年神崎庄は宋商周新の貿易船が同庄の管轄に属すると主張し、院宣の権威を以って大宰府の介入を排除しようとした。十世紀半ば頃完成したとされる古代管理貿易体制の規定によると、日本に来着した貿易船は大宰府の検領を経て朝廷の命令を待ち、朝廷の官司より必要とされる貿易品を朝廷に優先的に販売するのが原則であった。神崎庄は院政期の最高権力者である院を本所とする院領庄園であったにもかかわらず、国家権力による管理貿易体制の規定に正面から対抗していた。この事件は古代の秩序が変質し消滅していく古中世移行期の像をよく示すとともに、院政期の王権の執行者である院が国家的貿易管理の外側から対外貿易に接近していく姿を照明する。
今までの先行研究は『長秋記』長承二年八月十三日記事を国家的貿易管理の変質と終了という枠組みの中でのみ解釈してきた。そのため、神崎庄が大宰府を排除しようとしたことをすぐに同庄の預所で院近臣であった平忠盛の逸脱的な利益追求活動へ収斂させる傾向があった。近年、平忠盛だけではなくその背後にいた院にまで視座を拡張しようとする試みがなされ、事件の意味がより大きい脈絡の中で論じられるようになった。但し、事件を捉える焦点そのものは、依然として平清盛時代の日宋貿易の土台を築いた、院への奉仕を通じて中央政界での成功を成し遂げた武士という平忠盛個人に留まっている。しかしながら、忠盛個人の突出した特別な性質にだけ集中してしまうと、十二世紀初神崎庄において院が主導する貿易が行われていたことを語るこの史料の意味を十分に理解することは難しい。大宰府と大宰府が管轄する博多周辺の情勢・院庁内部の政治地形・院権力の権門としての側面など、白河・鳥羽院政期の歴史像のいろんな側面を含めて考察する必要がある。
『長秋記』記事に登場する人物たちの當時の立場を分析するのは長承二年八月十三日記事を支配している源師時の観点を相対化させ、記事の意味を考え直させる。今まで『長秋記』の記主源師時と最初問題提起者の大宰権帥藤原長実の立場は新興勢力平忠盛と対峙する既成秩序の擁護者として捉えられてきた。しかし、藤原長実は院近臣として院に仕えることにより本来の家格を超えた官位昇進を成し遂げたという点で、むしろ平忠盛と同じ範疇に入るべき人物である。したがって、単純に長実が忠盛と対立しているという事実だけで、彼を師時と同様の立場に立っている人物とみなすのは妥當ではない。
第一の手がかりは源師時が抱いていた問題意識である。師時が『長秋記』記事の中で平忠盛を批判する根拠として挙げたのは、安置・廻却は宣旨に従うべきだという原則の違反であった。十二世紀初に観察される大宰府管理貿易体制の衰退様相は、文面通りこの原則の違反が問題の原因ではる可能性が低いことを示唆する。すでに大宰府の府官さえ朝廷の廻却官符に従わない事態が頻発した。また、抑も神崎庄が院宣という強力な権威を以って大宰府の介入を拒否しようとしたのは大宰府が管内の国衙・寺社を統制する能力を失ったためであった。すなわち、大宰府が規定通り管理貿易の手続きを踏むようになると、貿易商人と貿易品の安全を保証されがたいほど、大宰府管内の混乱が深刻化した。取引の安全と貿易利益を保護するため、神崎庄は大宰府の長官に抗議されるのが當然なぐらいの無理を冒してても、大宰府の介入の全面拒否に出たのである。師時の批判は平忠盛という個人より、その背後にいる院、ひいて専制権力を振るい既存の秩序を破壊している院政という新しい政治秩序に向かっていた。
平忠盛は白河・鳥羽院の庇護下で海上勢力として成長した。平正盛以来、伊勢平氏が西国の制海権を握るようになったことには朝廷よりの追討使補任の影響が大きかった。追討使としての権威を背景に西国の海上勢力を平氏のもとに編成することにより海上交通を掌握し、水兵を確保した。忠盛の海賊追討使補任には白河・鳥羽院の積極的な支援があった。正盛・忠盛時期の平氏の政治的地位の上昇も同様であった。忠盛時代の院と平氏の関係を考えると、長承二年神崎庄の事件もまた、忠盛が直接的あるいは間接的に院の意向を奉じてそれを実行に移したことだったと見るべきである。師時の叙述が示唆するように、平忠盛が院近臣として院の権威を借り、既存秩序を無視する逸脱的な利益追求活動を行ったのではない。院宣を僭称するところか、むしろ院の指示または黙認が忠盛の背後にあった可能性が高い。
師時の叙述を相対化することにより今まで解釈から欠落されがちであった事件の當事者、藤原長実の立場についての分析が試みられるようになった。既存秩序を破壊する院政に対する批判という師時の問題意識とは別に、この問題を「問題」にさせた長実が振りかざしたのは「面目」の失墜であった。この「面目」は大宰府の長官としての権威・院近臣としての立地両方を含む言葉であった。特に長実の個人的な状況と彼の一族の當時の政治的立場を考慮すれば、長實は前者より後者に重きをおいていたと言えよう。また長実がこの問題の解決のために院へ訴えようとしたという事実は神崎庄の大宰府排除措置が院の家政の次元で行われたものであったことを意味する。
『長秋記』長承二年八月十三日記事は院が神崎庄を拠点として権門のような立場より対外貿易に参加していた可能性を見せるほとんど唯一な史料である。記主師時の観点から一歩離れて他の登場人物である院近臣・平忠盛と院近臣・藤原長実の立場をそれぞれ分析すると、院が参加する対外貿易の可能性がより鮮明に浮かんでくる。神崎庄のこの事件は院政期に加速した中央・地方の政治的構造変化の産物であった。古代の管理貿易体制は十一世紀より変質を始め、十二世紀に入ると消滅を迎える。これにより、貿易管理の中枢であった大宰府にも変化が生じ、大宰府内部とその管轄領域において大規模な勢力再編が行われ、権門貿易の基本構造が形成された。ちょうどこの時期に院も、十三世紀以降の対外貿易の主役になった大寺社権門のように、家産機構と家司を以って対外貿易に参加した。神崎庄という拠点を通じて行われた院の対外貿易は院権力の公私混淆的な性格を照明する一つの事例を提供する。
『장추기(長秋記)』 조쇼(長承) 2년 8월 13일의 기사는 상황(上皇, 院)의 권위를 내세운 간자키 장원(神崎庄)측과 고대 관리무역체제의 핵심 기구인 다자이후(大宰府) 사이에 벌어진 무역권 갈등을 기록했다. 간자키 장원은 규슈 서북부의 히젠 국(肥前国) 간자키 군(神崎郡)에 위치한 연해 장원으로, 9세기부터 대대로 원에게 상속되어 내려온 유서 깊은 원령 장원이었다. 조쇼(長承) 2년(1133) 간자키 장원 측은 송 상인 주신(周新)의 무역선이 자기 장원의 관할에 속한다고 주장하며 상황의 원선(院宣)을 근거로 서해도(西海道) 9국 2도(九国二島)를 관할하는 상급 행정기관이자 외교・무역기구인 다자이후의 개입을 거부했다. 10세기 중반에 완성된 고대 관리무역체제의 규정에 따르면, 일본에 도착한 무역선은 다자이후의 검령을 거친 후 조정의 명령에 따라 조정의 관사(官司)에 필요한 무역품을 조정에 우선적으로 판매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간자키 장원은 원정기(院政期) 최고 권력자인 원(院)이 소유한 원령 장원(院領荘園)이었음에도 국가 권력이 정한 관리무역체제의 규정에 정면으로 대항하고 있었다. 이 사건은 고대의 질서가 변질되고 소멸해 가는 고중세 이행기의 시대상을 잘 드러내 줄 뿐만 아니라, 원정기 왕권 집행자인 원이 국가적 무역관리의 바깥에서 대외무역에 접근해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선행연구에서 『장추기』 조쇼 2년 8월 13일 기사는 국가적 무역관리의 변질과 종료라는 맥락 안에서만 해석되어 왔다. 그러다 보니 간자키 장원 측에서 다자이후를 배제하고자 했던 것을 별다른 고민 없이 장원영주이자 원의 근신(院近臣)인 다이라노 다다모리(平忠盛)의 일탈적인 이익추구 행동으로 수렴시키는 경향이 있었다. 최근 다이라노 다다모리를 벗어나 그 배후에 있는 원으로까지 시야를 확장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면서 사건의 의미가 더욱 큰 맥락 안에서 논의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사건을 바라보는 초점 자체는 여전히 대송무역(対宋貿易)의 전성을 누린 다이라노 기요모리(平清盛)의 아버지이자 원에게 봉사하여 중앙 정계에서 성공을 거둔 무사라는 다다모리 개인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다다모리 개인의 돌출된 특별한 면모에만 집중하게 된다면 12세기 초에 간자키 장원에서 원이 주도하는 무역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이 사료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다. 다자이후와 다자이후가 관할하는 하카타 주변 지역의 정세, 원청 내부의 정치적 지형, 원 권력의 권문(権門)적인 면모 등 시라카와・도바 원정기(白河・鳥羽院政期) 역사상의 다양한 측면이 함께 논의될 필요가 있다.
『장추기』 기사 속 인물들의 당시 입장을 분석하는 작업은 조쇼 2년 8월 13일 기사의 서술을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는 서술자 미나모토노 모로토키(源師時)의 관점을 상대화함으로써 기사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그동안 서술자 미나모토노 모로토키와 최초 문제 제기자이자 다자이후 장관인 후지와라노 나가자네(藤原長実)의 입장은 비교적 새로운 세력인 다이라노 다다모리와 대립하는 기존 질서의 옹호자로서 파악되었다. 하지만 후지와라노 나가자네는 원근신으로서 원에게 봉사함으로써 기존 가격(家格)을 뛰어넘는 관위 승진을 달성했다는 점에서 오히려 다다모리와 한 데 묶일 수 있는 인물이었다. 따라서 단순히 나가자네를 다다모리와 대립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모로토키와 같은 범주의 인물로 치부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첫 번째 실마리는 미나모토노 모로토키의 문제의식을 살펴보는 것이다. 모로토키가 『장추기』 기사 속에서 다이라노 다다모리를 비판하는 근거로 든 것은, 무역의 가부는 선지가 결정해야 한다는 원칙의 위반이었다. 12세기 초 다자이후 관리무역체제의 쇠퇴 양상을 보면 문면 그대로 이 원칙의 위반이 문제의 원인은 아니었다. 이미 다자이후 관인들조차 조정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사태가 빈발하는 상황이었다. 또 애초에 간자키 장원측이 원선이라는 막강한 권위를 내세워 다자이후의 개입을 거부하게 된 것은 다자이후가 관내의 국아(國衙)와 사사(寺社)를 통솔할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었다. 즉 다자이후가 기존의 규칙대로 관리무역의 절차를 수행한다고 했을 때, 무역 상인과 무역품의 안전이 확보되지 않을 정도로 다자이후 관내의 혼란상이 심화되었기 때문에, 거래의 안전과 무역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간자키 장원측은 다자이후 장관에게 항의를 받을 정도의 무리를 해서라도 다자이후 개입의 전면 거부에 나섰던 것이다. 모로토키의 비판은 다이라노 다다모리라는 개인보다는 그 배후에 있는 원, 나아가 전제적인 권력에 기반해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고 있는 원정이라는 새로운 정치 질서를 향해 있었다.
다이라노 다다모리는 시라카와・도바 원의 비호 아래에서 해상 세력으로 성장했다. 다이라노 마사모리 이래로 이세 헤이시(伊勢平氏)가 서국(西国)의 제해권을 확보하게 된 것에는 조정으로부터 해적 추토사(追討使)로 보임되었던 영향이 컸다. 추토사로서의 권위를 바탕으로 서국의 해상 세력을 헤이시의 세력으로 조직함으로써 해상교통을 장악하고 수병을 확보했다. 다다모리가 해적 추토사로 임명되는 데에는 시라카와・도바 원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다. 마사모리・다다모리 대의 헤이시의 정치적 지위 상승 또한 마찬가지였다. 원과 다다모리 이전까지의 헤이시 사이의 관계를 생각하면, 조쇼 2년 간자키 장원의 일 역시 다다모리가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원의 의향을 받아서 실행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모로토키의 서술이 시사하는 대로, 다이라노 다다모리가 원의 근신으로서 원의 권위에 기대어 기존 질서를 무시하고 일탈적인 이익추구활동을 벌인 것은 아니다. 원선을 참칭하기는커녕 오히려 원의 지시 혹은 묵인이 배후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모로토키의 서술을 상대화하면서 그동안 사료 해석에서 누락되어 왔던 사건 당사자, 후지와라노 나가자네의 입장에 대한 분석을 시도할 수 있게 되었다. 기존 질서를 파괴하는 원정에 대한 비판이라는 모로토키의 문제의식과는 달리, 이 문제를 '문제'로 만든 나가자네가 문제 제기의 근거로 표방한 것은 '면목(面目)'의 실추였다. 이 '면목'은 다자이후 장관으로서의 권위와 원근신으로서의 입지 양쪽을 모두 포괄하는 단어였다. 특히 나가자네의 개인적 상황과 그 일족의 당시 정치적 입지를 고려하면, 나가자네는 전자보다 후자에 더 큰 비중을 두었다고 할 수 있다. 또 나가자네가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원에게 상서를 올려 항의하려고 했던 사실은 간자키 장원측의 다자이후 개입 거부 조치가 원의 가정(家政) 차원에서 이루어진 일이었음을 암시한다.
『장추기』 조쇼 2년 8월 13일 기사는 원이 간자키 장원을 거점으로 삼아 권문(權門)과 유사한 입장에서 대외무역에 참여하고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거의 유일한 사료이다. 서술자 모로토키의 관점에서 한 발 벗어나 다른 등장인물인 원근신 다이라노 다다모리와 원근신 후지와라노 나가자네의 입장을 각각 분석하게 되면, 원이 참여하는 대외무역의 가능성이 더욱 분명해진다. 간자키 장원의 이 사건은 원정기에 가속된 중앙・지방의 정치적 구조 변화의 산물이었다. 고대의 관리무역체제는 11세기부터 변질되기 시작해 12세기가 되면 소멸을 맞이한다. 이에 따라 무역관리의 중추였던 다자이후에도 변화가 생겨 다자이후 내부와 그 관할 영역에서 대규모의 세력 재편이 이루어졌고, 한편에서 권문무역(權門貿易)의 기본 구조가 형성되었다. 바로 이 시기에 원 또한 13세기 이후 대외무역의 주역이 된 대사사권문(大寺社權門)처럼 가산기구(家産機構)와 가사(家司)를 활용해 대외무역에 참여했다. 간자키 장원이라는 거점을 통해 이루어진 원의 대외무역은 원 권력의 공사혼효(公私混淆)적인 성격을 분석하는 또 하나의 사례를 제공한다.
Language
kor
URI
https://hdl.handle.net/10371/175814

https://dcollection.snu.ac.kr/common/orgView/000000165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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