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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2세기 高麗 選擧制의 운영 원리와 변천
The Operating Principle and Transition of Recruitment System in Goryeo Dynasty during 10th~12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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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김우택
Advisor
남동신
Issue Date
2021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Description
학위논문(박사) -- 서울대학교대학원 : 인문대학 국사학과, 2021.8. 남동신.
Abstract
본 연구는 10~12세기에 고려 왕조에서 論功行賞을 근본적인 운영 원리로 삼아 選擧制를 운영하였던 양상을 확인하고, 選擧制의 두 축인 蔭敍制와 科擧制의 정비 과정과 그에 따른 변천상을 위의 원리와 연결시켜 이해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는 ‘능력에 따른 선발’인 과거제와 ‘혈통에 따른 선발’인 음서제라는 기존의 이해를 심화시키려는 것이다. 즉 능력와 혈통은 표면적인 방식이며, 두 제도의 深層에는 ‘功獻’을 근본적인 요소로 삼는 論功行賞 원리가 작동하고 있었다는 것이 본 연구의 핵심적인 주장이다.
選擧의 기준은 일차적으로 왕조에 대한 공헌이었으며, 고려 왕조가 爲民政治를 추구했기에 궁극적으로는 民에 대한 공헌이 기준이 되었다. 공헌의 범주에는 業績과 노력, 희생 등 폭넓은 사항들이 내포되어 있었다. ‘功’을 논하고 ‘賞’을 정하여 반포하는 주체는 국왕이었으나, 이는 私的인 결정이 아니라 朝廷의 公論을 거친 결정이었다.
이 원리는 生業을 世代 간에 承繼하는 것이 중요했던 당시의 사회적 현실, 그리고 先代의 삶이 後代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는 ‘積善餘慶’ 관념과 결합되어 選擧制를 작동시켰다.
본 연구에서는 음서제와 과거제를 작동시킨 근본적인 운영 원리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두 제도의 공존과 운용을 살폈다. 이를 통하여 選擧制를 운용하였던 고려인들의 입장에서 음서제와 과거제를 이해하고, 나아가 고려인들의 心性의 한 측면에 접근하려는 시도이다.
본 연구의 핵심적인 분석 대상은 음서제와 과거제이다. 또한 이와 관련하여 學校制가 함께 검토되었다. 제도적인 측면에서 각 제도의 성립과 변천상을 검토하되, 이를 論功行賞 원리 및 業 承繼의 필요성 , 그리고 積善餘慶 인식과 결부시켜 분석하려 한다. 이를 위하여 {高麗史}와 {高麗史節要} 등 연대기 자료와 墓誌銘 등 金石文 자료, 그리고 {東文選} 등에 수록된 고려인들의 글 등을 종합적으로 이용할 것이다. 10~12세기로 시기를 설정한 것은 10세기 후삼국 시기의 시대적 특성 속에서 고려 왕조가 탄생하였고, 12세기 후반의 武臣政變 이후로 몽골과의 전쟁 및 元의 강력한 영향 등 시대상에 여러 번의 큰 변화가 생기기 때문이다. 물론 10~12세기에 설정된 選擧制의 큰 틀은 이후 시기에도 지속되지만, 상당한 변화가 생기므로 본 연구에서는 武臣政變 이전까지를 대상으로 삼았다.
고려 왕조는 918년에 건국되었다. 당시는 이른바 ‘후삼국 시대’로, 신라 왕조의 집권력이 약해지면서 각지에서 지역 세력들이 새롭게 대두하여 경쟁하던 시기였다. 지역 세력들의 형성 과정에서 利害에 따른 개인 간의 결속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人的 결속을 이루는 데에는 論功行賞이 효과적이었다. 이는 骨品制 등 기존 신라의 사회 질서를 대체하며 확산되었고, 고려 왕조도 이를 채택하였다. 세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공헌의 범주에는 다양한 경우들이 포함되었다.
또한 더 폭넓은 지지 확보를 위하여 왕조의 정당성에 대한 명분 수립이 필요하였는데, 고려 왕조는 ‘爲民’을 闡明하였다. 이로써 고려의 국왕은 하늘을 대리하여 백성을 보살피는 존재로 설정되었고, 고려의 관리는 국왕을 보좌하여 爲民政治에 공헌하는 존재로 위상이 부여되었다.
太祖 사후 벌어진 정치적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光宗은 다시 爲民政治를 강조하였다. 이를 구현하기 위하여 文士들을 크게 우대하는 한편, 안정적으로 文士들을 官吏로 등용할 수 있도록 과거제를 설치하였다. 太祖代에 文士들이 국왕과 개별적으로 접촉하여 기용되던 상황에서 이제는 定例的이고 普遍的으로 선발되는 상황으로 진전된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光宗과 朝廷 重臣들 간에 갈등이 야기되었다. 漢人 文士들 등을 중용하고 각종 개혁을 추진한 光宗의 정치에 대하여 부당한 論功行賞을 시행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光宗의 개혁이 功臣의 자손에 대한 처벌까지 이어지자 불만이 더욱 커졌다. 이는 太祖代에 약속되었던 後繼 承繼에 대한 보장이 깨졌다는 불만이었다. 이 문제는 光宗代에 해결되지 못하고 후대로 이어졌다.
後繼 承繼에 대한 문제는 景宗代부터 진행된 전반적인 官吏 組織 정비 속에서 해법이 모색되었다. 成宗代에 考功司를 통해 官吏들의 근무 실적을 평가하고 이를 토대로 官品을 올리도록 한 것은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즉 官吏로 근무한 것이 ‘功’으로 평가된다는 점이다. 또 配享功臣 제도를 설치하여 政績에 따라 功臣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두었다. 穆宗 즉위시에 처음으로 음서가 반포되면서 官品을 기준으로 삼은 것은 官吏層 전반에 대한 보편적인 後繼 承繼 방식이 설정되었다는 면에서 중요하다.
顯宗代에 각종 戰亂이 발생하면서 功臣을 顯彰할 필요가 생겼고, 功臣 자손에 대한 음서가 추가되었다. 論功行賞은 功에 비례하여 賞이 주어지는 것이므로, 功臣 자손에 대해서는 일반 官吏의 자손보다 더 큰 혜택이 주어졌다. 군사적으로 이룬 업적에 대해서도 그 공헌을 포상하였지만, 정치면에서 쌓은 업적도 물론 인정되었다. 또한 비록 실패했거나 희생되었더라도 널리 공헌으로 인정하여 포상하였다. 이러한 포용성은 選擧制의 중요한 특징이 되었다.
고려 시대에 음서제가 구현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인들의 관념에 수용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인들에게는 生業을 무사히 다음 世代로 承繼할 수 있는 것이 중요했다. 이를 구현하는 것이 爲民政治를 추구하는 국왕의 소임이었으며, 官吏層도 臣民의 일원으로 그 대상이었다. 그러나 사회 상층부를 구성하는 官吏層을 무조건적으로 承繼시킬 수는 없었다. 이에 官吏의 所任을 설정하고, 官吏로서 쌓은 실적을 功으로 삼았다. 공헌이 충분이 쌓이면 蔭이 생성되어 후대로 전해졌고, 국왕은 이를 토대로 職을 수여하는 것이 음서제의 작동 방식이었다. 즉 官吏들이 蔭을 생성하기 위하여 능동적으로 자신의 業에 충실하도록 勸勉하는 장치가 내포되어 있었다. 이를 통해 官吏層은 왕조와 民에게 공헌해야 한다는 정체성이 형성될 수 있었다.
王命을 통해 반포되었던 음서 규정은 지속적인 효력을 지니며 法制로서 준용되었다. 朝廷에서는 이 규정들을 토대로 음서 대상자들에 대하여 심사하고 公論을 통해 결정을 내렸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음서가 반포된 시점부터 개인이 蔭職을 받는 시점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소요되기도 하였다. 또한 국왕 즉위 등 간헐적인 행사뿐만 아니라 諦·祫 제사와 팔관회 등 정례적인 행사 뒤에도 頒赦가 이루어지며 음서가 반포되었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음서제는 지속적으로 더욱 체계화·표준화된 제도로 정비되었다. 官吏를 기준으로 그 父母나 妻에게 지위를 부여하는 封爵 체계 속에 넣어 ‘爵’을 부여하는 것으로 명칭을 고쳤다가, 이후 다른 가족에 대한 封爵과 구분을 명확히 하기 위하여 同正職으로 명문화하였다. 現任官과 致仕官을 명시하고 官品에 따라 부여되는 蔭職의 종류도 규정하여 표준화된 제도로 체계화시켰다. 한편 祖宗苗裔에 대한 음서도 제도에 편입되고, 점차 음서의 대상과 반포 계기가 확대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이는 同正職을 수여받은 官吏層 자제의 증가를 뜻하며, 향후 實職을 획득하고 官路에서 유리한 지위를 얻기 위한 경쟁이 치열해질 시대적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한편, 爲民政治를 구현하기 위해 공헌할 수 있는 文士를 선발하는 제도인 과거제도 지속적으로 정비되었다. 고려 왕조에서는 급제자에게 각종 榮譽를 부여하여 사회적으로 그 위상을 높여주었다. 급제자들에게 특별한 포상을 내린 것은 그만큼 그들이 왕조를 위해 크게 공헌할 존재임을 널리 알리고, 文士들에게도 召命意識을 지니도록 하려는 조치였다. 文士들은 자신의 소양을 통하여 文治를 구현하는 데에 보좌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존재로 勸勉되었다.
소양과 식견을 갖춘 文士들을 양성하고 선발하기 위한 과거제와 학교제 정비가 크게 세 가지 방향에서 진행되었다. 우선 開京과 지방의 文士들에게 國子監 설치와 學官 파견, 敎材 송부 등을 통하여 公式的이고 표준화된 교육을 시행하려는 조치들이 이어졌다. 또한 각지의 文士들이 널리 과거에 참여할 수 있도록 鄕貢을 선발하여 올려보내는 제도들이 마련되었으며, 더 넓은 鄕吏層 子弟가 응시할 수 있는 방향으로 정비되었다. 전체적인 시험 운영과 구체적인 절차들도 마련되어 더욱 공정하고 체계적인 論功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준비되었다.
이러한 과거제 운영은 ‘文章華國’에 대한 文士들의 召命意識 함양으로 이어졌다. 이는 學業을 통해 얻은 학문적·문화적·정치적 소양으로 정치에 참여하여 文治를 구현한다는 뜻이었다. 이는 왕조에서 文士들에게 기대한 것인 동시에 文士들 스스로 자각한 召命意識이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급제한 엘리트뿐만 아니라 부진하거나 결격 사유가 있었던 文士들에 대해서도 功을 논하여 구제해주는 모습들이 나타난다는 점이었다. 또한 성과가 부진한 지역이나 과거 시험 분야에 대해서도 勸勉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恩賜及第 수여는 그 대표적인 예였다. 비록 충분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더라도, 오랫동안 學業에 功을 들인 것에 대하여 포상을 내린다는 인식이 보인다. 이는 사회 전반적으로 文風을 흥기시켜 文治에 도달하기 위한 조치들이었다.
睿宗代에 經學이 매우 중시되면서 과거제와 학교제에도 큰 개편이 이루어졌다. 과거 시험에 經義가 도입되고 經學 교육을 중심으로 학교가 정비되었고, 두 제도가 한층 밀접하게 연동되는 방향으로 정비되었다. 이는 成宗代부터 추진되었던 公式的 교육을 통한 文士 양성과 과거제 운영이라는 정책 추구에 큰 진전을 이룬 것이었다. 또한 이를 통하여 私學도 公式的인 교육과 선발 체계에 점차 연동되어 운영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文士에 대한 論功의 기준과 방식이 개편된 것이다.
과거제가 고도화되면서 文風이 興起하자, 사회적으로는 兩價的인 양상이 나타났다. 한편으로는 武學齋나 明法業 등을 통해 비교적 쉽게 급제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이는 당시 음서제가 확대되면서 官路에 경쟁이 심해지자 좀 더 유리한 입지에 서기 위하여 급제자 지위를 획득하려 했던 동기도 작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같은 시기에 반대로 적극적으로 學業에 임하여 높아진 과거제의 수준을 넘기 위해 매진하는 모습들이 더욱 확연히 드러났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文士들은 文章華國에 대한 자신들의 召命을 더욱 강하게 인식하였다. 음서로 관리가 되는 것은 선대의 蔭만 있으면 어렵지 않았으나, 과거에 급제하는 것은 본인의 능동적인 노력이 크게 필요한 일이었다. 여기에 先代의 공헌이 後代로 전해져 결실을 맺는다는 ‘積善餘慶’ 인식이 결합되었다. 이제 대대로 文의 습득을 위해 노력하며 文治를 위해 공헌하는 것이 자신들의 家業이자 召命이라는 인식이 文士層에 널리 확산되었다.

주제어 : 選擧制, 蔭敍制, 科擧制, 論功行賞, 永業, 積善餘慶, 爲民, 文章華國
This dissertation examines the operating principle and transition of recruitment system in Goryeo Dynasty during 10th to 12th century. The fundamental principle was to 'reward according to contributions(論功行賞).' The two main sub-systems of the recruitment system were State Examination System(科擧制) and Legacy Appointment System(蔭敍制). Both systems, instituted in Goryeo Dynasty for the first time in Korean peninsula, were operated under this fundamental principle.
There has been a conventional recognition: State Examination System(科擧制) is based on the merit and Legacy Appointment System(蔭敍制) is based on the pedigree. It is valid as superficial principle. However, contribution(功獻) was the fundamental element that activated both systems. The category of contribution included various factors: achievement, effort, sacrifice, etc. The contribution was devoted to the dynasty, which proclaimed its dedication to ‘the welfare of the subjects(爲民)’. Therefore, the contribution of officials(官吏) was ultimately to the subjects, or people of Goryeo. The king and the court evaluated contributions of individuals to bestow official status on them.
Legacy Appointment System was operated based on the legacy(蔭) of an official. An official accumulated his contribution by participating in the administration and politics, which promoted his rank and produced legacy. When he reached sufficiently high official rank(官品), the king bestowed initial official rank to his successor, mostly his son. As Officials of High Contribution(功臣) produced extra legacy, the king granted higher official ranks to their wider successors. Higher contribution created further benefits.
It was highly important for everyone in Goryeo society to keep one's job(業), or means of life, securely and convey it to the next generation. 'Prolonged succession of job(永業)' was imperative. King's duty was to ensure everyone in Goryeo Dynasty leads stable life for generations. It was king's vocation. Thus, ensuring the succession of officials' family was also king's duty. But as the officials were upper class, the king did not authorize automatic succession of officials' status. To promote them to devote themselves to the contribution for the dynasty, the Legacy Appointment System was adopted.
State Examination System was operated based on the achievement of literati(文士). Goryeo dynasty set up the State Examination System(科擧制) to select worthy literati that achieved high level of studies in regular basis. Successful examinees were granted official rank. This selection was carried out not only testing literati's level of accomplishment(功) in studies, but also evaluating their effort(功).
Successful examinees were honored exceptionally by the dynasty. This special treat was not just for their score. It was to manifest that Goryeo Dynasty values literati's merit, whose merit would assist the king to fulfill his vocation, thus enhancing the welfare of the subjects(爲民). This will prevail the 'reign in culture(文治)', the ideal object of politics in medieval north-east Asia. Again, higher contribution created further benefits.

The Legacy Appointment System(蔭敍制) is assumed to have been initially created in late 10th century, during king Seongjong(成宗)'s reign, although the first record of proclaim shows on next king's coronation after his passing. The first institution was applied to all the officials in rank. When an official reached the 5th rank(5品), Legacy Post(蔭職) for his successor was bestowed on him.
During 11th to 12th century, the system was extended. The bestowal was done also to the successors of Officials of High Contribution(功臣) and to the Descendants of Kings(祖宗苗裔). Logically, as kings contributed to the dynasty, their descendants were worthy of the legacy appointment. The benefits for these categories were higher, as their contributions were extensive. Concurrently, the system was refined and standardized. The Legacy Appointment System encouraged officials to actively contribute for the dynasty, thus for their descendants. Consequently, this system developed the officials' identity as contributors for the dynasty and welfare of the people.
State Examination System(科擧制) was first adopted in 958, during king Gwangjong(光宗)'s reign. This system was intended to secure worthy literati stably. Since king Seongjong(成宗)'s reign, the effort to raise literati statewide through the official education and to encourage them to participate in the State Examination elevated intently. During 11th to 12th century, this effort achieved significant success as the system were consistently refined. As the new wave of Confucianism(經學) was introduced to Goryeo, it was adopted to the State Examination System and the school system. The importance of literati's contribution was regarded even more crucial.
Simultaneously, state's level of 'cultural ambience(文風)' elevated. This led literati to recognize their vocation rigorously. They sought to contribute to the dynasty with their 'literary abilities(文章)', thus ‘enhancing the state's cultural level(華國)’. Literati shaped their identity as high contributors for the dynasty and welfare of the people. If literati 'devoted themselves to the culture(積善)', it would 'generate legacy(餘慶)', which would cause the descendants' superb ability. This vocation had to be carried on for generations in their mind.

Keywords : recruitment system(選擧制), Legacy Appointment System(蔭敍制), State Examination System(科擧制), reward according to contributions(論功行賞), prolonged succession of job(永業), if one devotes himself to the culture, it will generate legacy(積善餘慶), welfare of the subjects/people(爲民), enhancing state's cultural level with literary abilities(文章華國)
URI
https://hdl.handle.net/10371/177358
Files in This Item:
Appears in Collections:
College of Humanities (인문대학)Korean History (국사학과)Theses (Ph.D. / Sc.D._국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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