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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대 월해관과 관세 대리 징수 구조 : 海關兩의 기원과 관련하여
清代粤海关与关税代理征收结构 : 关于“海关两”起源的内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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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주형준
Advisor
김형종
Issue Date
2021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Keywords
榷關常關海關粵海關粵海關監督廣州廣東體制行商保商一口通商五口通商海關銀號海關兩關平銀司碼銀庫平銀스페인 은화包攬징세청부업榷关常关海关粤海关粤海关监督广州广东体制海关银号海关两关平银司码银库平银包揽
Description
학위논문(박사) -- 서울대학교대학원 : 인문대학 동양사학과, 2021.8. 김형종.
Abstract
本学位论文为旨在分析广东体制下粤海关的关税代理征收结构及海关独立货币单位使用习惯方式的研究内容。清朝在康熙23年(1684)以四口通商的方式重启对外贸易后,以乾隆24年(1759)发生的洪任辉事件为契机,建立起了以一口通商及行商制度为特征的对外贸易管理制度,即“广东体制”,广东体制的建立标志着广州粤海关对外贸易惯例及清朝对西洋贸易政策的制度化。然而随着道光22年(1842)《南京条约》签订,除广州外另有四处被新设为通商口岸,行商对贸易权的垄断被剥夺,广东体制亦趋于解体。故可可将“广东体制下的粤海关”概括归纳为集1759年至1842年间围绕广州粤海关为中心所进行清朝对外贸易政策的管理制度。
同时,鸦片战争战败导致广东体制解体的事实,其并不意味着清朝对传统对外贸易管理制度的抛弃。清朝反而在原先广东体制的基础上,凭借自身运营经验探索并摸索出新替代方案。因此,将此基础模型理解为广东体制下粤海关的征税结构,自然且符合常理,尽管在此过程中必然存在由条约签订所带来的对外贸易扩大化,及为适应贸易方式改变而进行的补充与调整。基于此种理解,可以将随广东体制解体而兴起的五口通商时期(1842-1858)视为清朝在既存征税体系基础上不断构建新型对外贸易管理制度的时期。
因此,对广东体制下粤海关的构成,特征,结构组合,运转机制,乃至对户部对西洋贸易政策的变化及该变化对征税结构的影响,抑或是对直至鸦片战争前清朝构筑的征税体系,对外贸易政策内容等一系列主题的探讨,均为应以对五口通商时期海关及多口通商时期出现的“近代海关”性质的理解为入手点而率先解决的课题。通过对此种课题的研究,亦可理清清朝海关政策的连续性,为外国人税务司制度的建立及“近代海关”的出现提供新的合理解释。
而清朝重启对外贸易后所设海关,亦随管理内地全部贸易活动的榷关体制而运营。其中由明代钞关演化而来的榷关,因其包含清代户部与工部管辖下的税关“户关”与“工关”,故可将其理解为广义上征收通关税的税关。然榷关体制的“全国税关在一定期限内按每年定额进行精准结算”的初衷,则反映了被称为明清两代财政运营原理特征之一的原额主义被应用于管理对外贸易方式的情况。
其中,广东体制下的粤海关,不仅是清朝对西洋贸易的唯一港口,亦作为具有与内地常关按同一定额主义特性而运营的户部征税机关。尽管其作为外贸易港口,随对外贸易量增加而在一定程度上具有存在威胁定额主义的可能性,但此点亦为区别于内地常关的海关本质属性体现。而此种现象在商品流通交易量无大幅变化的康熙年间尚无大碍,但随着雍正年间实施耗羡归公,将陋规定为杂税而征收,其造成税收大幅增长的同时, 超过康熙年间所定榷关定额的额外征收额亦开始增长。因此,截至乾隆初年,随着国内商品流通量增长与对外交易的急剧增长,超过榷关定额的额外征收额已大幅超过了原有有定额。
特别是乾隆初年对西洋贸易中心粤海关的发展甚为惊人。随着粤海关税收规模增大,其额外征收额所占比重亦逐渐增高。而对户部而言,尽管额外征收额的增减管理日趋重要,但榷关体制下,户部无法直接监督各地区税务征收的过程,其对征税机关的极度不信与怀疑则以强化会计结算的方式体现出来。其中,依户部施政方向所实行的一连行政手段则可概括称为保证“粤海关行政严肃公正”的举措。
广东体制下的粤海关, 则以不同于内地常关的方式及形态运营。其在承认行商在贸易中优越地位的同时,亦强令其承担大部分关税的课税与征收,与西洋人管理等关税行政。此种将关税行政的大部委托的征税承包制, 亦为当时清朝所承认的合法活动。而对于来自民间的税务承包者而言,除榷关体制所规定行政流程外,在委托关税行政的代理征收结构中仍存有各种附加项,户部则对此例外项则予以非正式默认。尽管户部制定的粤海关运营原则承认对关税代理征收结构应符合因地制宜,但这并不意味着其允许脱离榷关体制下的额外支出。
至乾隆初年,粤海关已成长为占全国榷关税收比重极高的特殊榷关而备受户部关注。乾隆年间对榷关体制的不断的改变与修正,正是户部为克服自粤海关而始的正额主义缺陷及副作用而采取的举措。其对粤海关行政采取的严肃公正政策,亦以针对对榷关体制离心力不断加剧的粤海关为方向。因此,粤海关行政严肃公正政策其本身,亦作为既存基础上的特例,以减少,乃至取消例外的基础大方向上展开并施行,这便是户部欲强化榷关体制统一性的意图所在。同时,由于该政策及施策方向适用于鸦片战争以前唯一的对西洋贸易港口,从而与内务部财政联系紧密,并具有特殊地位。而对于此种关系及地位的先行解释与理解方式则有所差异。
本学位论文则意在通过对乾隆29年(1764)在税收运送体系调整下水脚银的节省分归公,及乾隆43年(1778)对粤海关的税收结算期限设定的考察,探讨粤海关所认之特例为户部所否定的过程。而粤海关行政严肃公正政策的实施,不仅使在关税代理征收结构中享受既得利益的税务承包者权利缩减,亦成为当时费用支出增加的要因。作为税务承包者行商的主要权利之一,行商享有在截至会计结算日前可将征收关税调用为其事业运作资金的关税调用权。在当时不稳定的金融环境中,行商通过此权利有效解决了其对现金的大量需求,而关税调用期的缩减急剧则阻塞了现金的流动性。因此,随着乾隆43年(1778)粤海关税收结算日设定后,粤海关行政体系亦有所变化,进而成为导致嘉庆道光年间行商不断破产的直接或间接原因。
在粤海关的征收结构中,课税及关税征收主体(税务承包者)与税收会计处理主体(粤海关)相互分离。粤海关作为对西洋贸易的征税机关,其对精确课税,征收关税及会计结算至关重要,但随着对外贸易重启,广州在中国与西洋异质文明交融下为经济活动提供场所,并逐步发展为以贸易为媒介进行商品及货币交易的巨大市场的情况下,征税当局须对不同重量,纯度的中国银锭,乃至全世界流通的外国银元中纯银含有量进行准确“测定”,并“评价”其交换价值的能力。因此,粤海关的关税行政亦十分具有风险(risk),而征税当局并无甘受如此繁杂,直接执行风险如此之大业务的必要,故其委托与民间,以代理征收的方式来规避税务征收中的风险。
而对税务承包者而言,即使其被委任以关税行政(课税与征收),但税收的会计处理业务仍须由粤海关直接处理。而此处则涉及测定银两重量标准的砝码重量问题。已知关税的课税基准依户部会计基准制定,以库平银为标准。而称量货币体系的特征中,户部所用库平与各征税机关所用库平存在差异,在榷关体制下则将此调整费用列为正式支出。而粤海关关税则由税务承包者代为征收,行商所用库平与粤海关所用库平间亦存在差异。即税务承包者—粤海关—户部三个经济主体所用测定银两重量的标准,砝码其本身重量存在差异的问题。但榷关体制下仅将粤海关及户部调整费用认定为支出,而税务承包者至户部间的砝码重量差异,则另须经过其他换算,核算程序。因此,乾隆29年(1764)在节省水脚银归公问题上户部与粤海关的矛盾亦由此产生。
对于砝码重量的差异,粤海关则需在关税征收与会计过程额外增加两次调整程序。此亦为区别于内地常关的粤海关行政特征,且在此过程中出现了作为中间阶段货币单位的关平银。广东体制下的粤海关使用以粤海关使用的库平砝码“粤海关平”测定重量的足色纹银“粤海关银”进行会计处理税收。而税务承包者行商则以广州市平“司码平”测量重量,而将粤海关银作为基准进行征收和代纳关税。粤海关虽以户部库平银为基准调整粤海关银的交换价值,并进行税收结算,但由于砝码重量差异,户部则需要最终以户部库平银为基准,额外增加调整其交换价值的程序。
在广东体制下粤海关系统变容及扩大的五口通商时期,新设海关虽采用依据条约改定的粤海关税则,但海关度量衡,会计年度,会计方法等则仍以粤海关为基准划一。且与前相比更加值得注意的是,在此期间,海关作为对外贸易的征税机关,其与内地常关的差异得到承认,不再被要求保持与榷关的同一性。自此,海关逐步脱离榷关体制,并形成了独立运营的原理。
而作为关税代理征收结构的衍生物,海关的独立货币单位亦得到了户部的正式承认。在五口通商时期,海关则使用以广东体制下粤海关的粤海关平作为关税征收的重量基准的“海关平”,关税则使用以海关平测定重量的足色纹银作为基准的关平银进行征收,而海关的货币单位最终于鸦片战争前后统一。同时,为人所熟知的“近代海关”货币单位海关两,则为西洋人在称呼关平银而所使用过的 “Haikwan teal”的译词。 因此可以说,鸦片战争后新设海关与“近代海关”中使用的货币单位海关两,亦是继承了广东体制下粤海关所使用过的粤海关银。
广东体制下粤海关的关税代理征收结构直至鸦片战争以后依然存在,而此种现象不仅仅是一种“惯性”,亦是签订条约双方相互协议的产物。在因鸦片战争行商无法参与关税行政的情况下,清朝虽然能够通过委托海关银号业务确保关税征收,但此种业务并不能保证短期间确保税务征收的课税能力。因此,五口通商时期走私逃税泛滥的根本原因,正是海关在进出口商品通关程序的把控及对商品准确课税处理上的无能所导致的。同时,对多口通商时期外国人税务司制度能够轻易安置于清朝,其中所表现出的亲和力,亦正是在于将关税行政委托与民间处理税务承包制的惯性,及与无法发挥其应有课税能力的海关体系的结构性组合。此亦是为理解关于“近代海关”出现的相关问题,而再度关注思考广东体制的理由。
본 학위논문은 광동체제下 월해관의 관세 대리 징수 구조와 해관의 독자적인 화폐 단위를 분석한 연구이다. 청조는 강희 23년(1684) 四口通商의 형식으로 대외 무역을 재개한 이후 건륭 24년(1759) 洪任輝事件을 계기로 一口通商과 行商制度를 특징으로 하는 대외 무역 관리 제도인 廣東體制를 완성하였다. 광동체제의 성립은 廣州의 상거래 관습과 청조의 對서양 무역 정책이 제도로서 정착된 것을 의미하였고, 도광 22년(1842) 南京條約의 체결로 廣州 외 네 곳에 통상 항구를 신설하고, 行商의 독점적인 무역 권한을 취소할 것이 결정되면서 해체되었다. 즉, “광동체제下 월해관”은 1759년부터 1842년까지 廣州의 월해관을 중심으로 하는 청조의 무역 정책이 집약된 관리 제도였다고 정리할 수 있다.
아편전쟁의 패배로 광동체제가 해체되었다는 사실은 전통적 대외 무역 관리 제도의 폐기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청조는 기존에 체제와 운영 경험을 토대로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였으며 광동체제下 월해관의 징세 구조는 그 모델이 되었다. 물론, 이 과정은 조약에 따른 대외 무역의 확대와 무역 방식의 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수정과 보완을 거쳐야 하였다. 이러한 측면에서 광동체제가 해체되고 시작된 五口通商 시기(1842-1858)는 청조가 기존의 징세 시스템을 밑바탕으로 새로운 형태의 대외 무역 관리 제도를 구축해 가는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광동체제下 월해관의 구성과 특징, 구조적 결함, 작동 매커니즘뿐만 아니라 호부의 對서양 무역 정책에 변화와 그것이 징세 구조에 끼친 영향 등 아편전쟁 직전까지 청조가 구축한 징세 시스템과 대외 무역 정책의 내용을 검토하는 작업은 오구통상 시기 해관을 이해하고, 다구통상 시기에 출현하는 ‘근대 해관’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선결되어야 할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은 청조의 해관 정책을 연속적으로 이해하고, 외국인 세무사제도의 성립과 ‘근대 해관’의 출현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할 것이라 생각한다.
대외 무역의 재개를 결정한 이후 설치된 海關은 모두 내지 무역을 관리하는 榷關體制에 따라 운영되었다. 명대 鈔關에서 유래한 榷關은 청대 호부와 공부에서 관할하는 세관인 戶關과 工關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으로서 통과세를 징수하는 세관이라고 정리할 수 있는데, 이 각관체제의 핵심은 榷關이 ‘매년 정해진 할당액을 정해진 기한 안에 정확하게 결산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명・청대 재정 운영 원리의 특징 중에 하나로 지적되는 正額主義가 대외 무역을 관리하는 방식에도 적용되어 있었다는 점을 그대로 보여준다.
광동체제下 월해관은 청조의 유일한 對서양 무역항으로서 내지 常關과 동일한 정액주의가 반영된 호부의 징세 기관으로서 운영되었다. 대외 무역항은 교역량의 증가에 따라서 정액주의를 위협할 가능성이 있었는데, 이것은 내지 常關과 구별되는 海關의 본질적인 속성이었다. 상품의 유통량과 교역량에 급격한 변화가 없었던 강희 연간에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옹정 연간 耗羨歸公을 거치며 陋規가 雜稅로 포함되었고, 세수가 급증하며 강희 연간 설정한 榷關의 할당액을 넘어서는 초과 징수분인 盈餘銀이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건륭 초까지 국내 상품 유통량의 증가와 대외 교역의 급격한 성장에 의해 榷關의 초과 징수분은 이미 할당액을 훨씬 넘어서게 되었다.
특히 건륭 초 對서양 무역의 중심지로 자리 잡은 월해관의 성장은 더욱 놀라운 것이었다. 월해관의 세수 규모가 커질수록 초과 징수분의 비중은 높아졌고, 호부의 입장에서는 초과 징수분의 증감를 관리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하지만 각관체제에서 호부는 각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징세 과정을 직접 감찰할 수 없었고, 징세 기관에 대한 호부의 뿌리깊은 의혹과 불신은 세수의 회계 결산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이어졌다. 호부의 정책 방향에 따라 시행된 일련의 행정 조치들은 “월해관 행정의 엄정화”로 정리할 수 있겠다.
광동체제下 월해관은 내지의 常關과는 다른 형태로 운영되고 있었다. 월해관은 행상이 무역에 관한 우월한 지위를 인정받는 반대급부로 관세의 과세와 징수 및 외국인을 관리 등 관세 행정의 대부분을 전담하는 형태의 징세청부제를 채택하였고, 이것은 청조로부터 정식으로 승인받은 합법적인 활동이었다. 민간의 징세 청부업자에게 관세 행정을 위탁하는 관세의 대리 징수 구조는 각관체제에서 규정한 행정 절차 외에 추가적인 항목들이 존재하였고, 호부는 이러한 예외를 비공식적으로 묵인하였다. 다만, 호부의 월해관 운영 원칙은 관세 대리 징수 구조를 因地制宜의 영역에서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하였고, 각관체제에서 벗어난 추가적인 지출을 허용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건륭 초 이미 월해관은 전국의 榷關에서 세수 비중이 가장 높았던 요주의 榷關으로서 호부가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건륭 연간 계속된 각관체제의 변화와 수정은 바로 월해관으로부터 시작된 正額主義의 한계와 부작용에 대한 호부의 조치였고, 월해관 행정에 대한 호부의 엄정화 정책의 방향은 각관체제로부터 원심력을 높여가던 월해관에 대한 대응이었다. 월해관 행정의 엄정화는 기존에 특례로서 인정되었던 예외들에 대한 취소 혹은 축소시키는 방향으로 전개된 것은 각관체제의 통일성을 강화하고자 했던 호부의 의도였다. 그리고 이러한 방향성은 아편전쟁 이전 유일한 對서양 무역항으로서 내무부 재정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특수한 지위를 가졌다고 설명하는 기존에 이해 방식과도 차이가 있는 것이었다.
본 학위논문은 건륭 29년(1764) 세수 운송 체계의 재편에 따른 水脚銀의 節省分에 歸公과 건륭 43년(1778) 월해관의 세수 결산 기한의 설정을 통해 월해관에 인정되었던 특례들이 부정되는 과정을 검토하였다. 월해관 행정의 엄정화는 관세의 대리 징수 구조에서 징세청부들이 누리고 있었던 기존 이권을 축소시키고, 비용의 지출이 증가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징세 청부업자였던 행상의 주요 이권 중에 하나는 징수한 관세를 회계 결산일 전까지 사업 자금으로 운용할 수 있는 관세 운용권이었다. 당시 불안정한 금융 환경에서 행상은 이를 통해 막대한 현금 수요를 해결할 수 있었고, 관세 운용 기간의 축소는 그들의 현금 유동성을 급격하게 경색시켰다. 건륭 43년(1778) 월해관의 세수 결산 기한의 설정에 따른 월해관 행정 체계의 변화는 가경제와 도광제 시기 행상의 연쇄적인 도산과 직・간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월해관의 징세 구조는 관세를 과세하여 징수하는 주체(징세 청부업자)와 세수를 회계 처리하는 주체(월해관)가 분리되어 있었다. 對서양 무역의 징세 기관으로서 월해관은 과세한 관세를 정확하게 징수하여 이를 회계 처리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였다. 하지만 대외 무역이 재개된 이후 廣州는 서양과 중국의 이질적인 문명이 만나는 열린 공간으로서 경제 활동을 매개로 상품과 화폐가 교환되는 거대한 시장으로 발전하였다. 따라서 징세 당국으로서는 다양한 무게와 순도를 가진 중국의 銀錠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유통되는 외국 은화의 순은 함유량을 정확히 ‘측정’하여 그 교환 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였다. 월해관의 관세 행정은 매우 위험(risk)가 큰 업무였다. 징세 당국은 이렇게 번거롭고 리스크가 큰 업무를 직접 수행하는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었고, 이를 민간에 위탁하는 대리 징수의 방식으로 해결하였다.
징세 청부업자에게 관세 행정(과세와 징수)을 위탁하더라도 세수를 회계 처리하는 업무는 월해관에서 직접 처리해야 하였고, 여기서 저울추 무게 문제가 발생하였다. 관세의 과세 기준은 호부의 회계 기준에 따라 庫平銀을 기준으로 하였다. 칭량화폐 체계의 특징상 호부에서 사용하는 고평과 각 징세 기관에서 사용하는 고평의 무게에 차이가 있었고, 각관체제에서는 이 비용을 정식 지출로 인정하였다. 하지만 월해관의 관세는 징세 청부업자가 징수하였으므로 행상이 사용하는 고평과 월해관에서 사용하는 고평에도 무게 차이가 있었다. 즉, 징세 청부업자-월해관-호부, 이 세 경제 주체가 사용하는 저울추의 무게 차이가 존재하였고, 각관체제에서 인정된 부분은 월해관-호부 간에 비용 지출뿐이었고, 징세 청부업자-호부의 저울추 무게 차이는 별도의 절차를 거쳐야 하였다. 바로 건륭 29년(1764) 節省水脚銀의 歸公을 둘러싼 호부-월해관의 갈등은 여기서 비롯되었다.
월해관은 저울추의 무게 차이로 인해 관세의 징수와 회계 과정에서 두 차례의 조정 절차가 필요하였고, 이것은 내지 常關과 구별되는 월해관 행정에 특징이었다. 그리고 과정에서 출현한 중간 단계의 화폐 단위인 關平銀이 출현하였다. 광동체제下 월해관은 월해관에서 사용하는 고평 저울추인 粵海關平으로 무게를 측정한 足色紋銀인 粤海關銀으로 세수를 회계 처리하였다. 징세 청부업자인 행상은 廣州의 市平인 司碼平으로 무게를 측정하여 월해관은을 기준으로 관세를 징수하여 대납하였고, 월해관은 월해관은을 호부 庫平銀 기준으로 교환 가치를 조정하여 세수를 결산하였지만, 저울추의 무게 차이에 따라 호부에서 최종적으로 호부 고평은을 기준으로 교환 가치를 조정하는 추가적인 절차가 필요한 셈이었다.
오구통상 시기는 광동체제下 월해관 시스템의 변용과 확대의 과정이었다. 신설 해관은 조약에 의거하여 개정한 월해관의 稅則을 적용하였고, 해관의 도량형, 회계 연도, 회계 방식은 월해관을 기준으로 통일하였다. 그리고 이보다 더욱 주목할 부분은 해관은 대외 무역의 징세 기관으로서 내지의 常關과 차이점을 인정받으면서 더 이상 榷關으로서의 통일성을 요구받지 않았다. 이 시기부터 해관은 각관체제로부터 벗어나서 독자적인 운영 원리를 구축하였다.
호부는 관세의 대리 징수 구조의 파생물인 해관의 독자적인 화폐 단위를 정식으로 인정하였다. 오구통상 시기 해관은 광동체제下 월해관의 월해관평을 관세 징수의 무게 기준으로 하는 海關平을 사용하였다. 관세는 해관평으로 무게를 측정한 족색문은을 기준으로 하는 關平銀으로 징수하였고, 결국 아편전쟁 전후 해관의 화폐 단위는 동일하였다. ‘근대 해관’의 화폐 단위로 익숙한 海關兩은 외국인이 관평은을 지칭할 때 사용했던 단어인 “Haikwan teal”의 번역어였고, 아편전쟁 이후 신설된 해관과 ‘근대 해관’에서 사용한 화폐 단위인 해관량은 광동체제下 월해관에서 사용되었던 粤海關銀을 계승한 것이었다.
광동체제下 월해관의 관세 대리 징수 구조가 아편전쟁 이후까지 유지된 현상은 일종의 ‘관성’이자, 조약으로 양측이 합의한 결과였다. 아편전쟁으로 행상이 관세 행정에 참여할 수 없게 된 상황에서 청조는 海關銀號을 통해 징수 업무를 위탁하여 해결할 수 있었지만, 과세 능력은 단기간에 확보할 수 있는 성격의 업무가 아니었다. 오구통상 시기 밀수와 탈세가 횡행한 근본적인 원인은 수・출입 상품의 통관 절차를 처리하여 상품에 정확히 과세할 수 없었던 해관의 과세 무능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구통상 시기 외국인 세무사제도가 큰 거부감 없이 청조에 안착할 수 있었던 친화력은 바로 관세 행정을 민간에 위탁하여 처리하던 징세청부의 관행과 함께 과세 능력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던 해관 시스템의 구조적 결함에 있었다. ‘근대 해관’의 출현에 관한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 다시 광동체제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Language
kor
URI
https://hdl.handle.net/10371/178342

https://dcollection.snu.ac.kr/common/orgView/000000168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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