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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에티우스 『철학의 위안』 5권에서 신학적 운명론의 문제 : Theological Fatalism in Boethius 『The Consolation of Philosophy』, Book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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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홍은진

Advisor
강상진
Issue Date
2021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Keywords
보에티우스철학의 위안신학적 운명론예지BoethiusThe Consolation of PhilosophyTheological FatalismForeknowledge
Abstract
나는 오늘 저녁 7시에 산책을 하고자 한다. 그런데, 전지한 신이 존재한다. 전지한 그 신은 내가 오늘 저녁 7시에 산책할 것임을 틀림없이 안다. 그렇다면 나는 오늘 저녁 7시에 산책하는 일을 피할 수 없이 하게 될 것이다. 달리 말해, 내게는 오늘 저녁 7시에 산책하는 것 외 달리 할 수 있는 바가 없다. 따라서 내가 오늘 저녁 7시에 산책하는 것은 자유롭게 행해지는 것이 아니다. 미래사에 대한 신의 앎과 인간사의 자유의지가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러한 형태의 논증을 신학적 운명론(Theological Fatalism)이라고 불러 보자. 본 논문의 목표는 신학적 운명론의 고전적 전거(Locus Classicus)인 『철학의 위안』 5권 3-6장을 해석하는 한 가지 방식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데 있다. 일반적으로 이 문제에 대한 대한 보에티우스적 해법(Boethian Solution)은 신이 미리 아는 것을 부정하는 전략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5권 6장에서 제시되는 바, 신은 시간적인 것과 달리 영원한 존재자라는 영원론이 그 해석의 근거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보에티우스 자신의 해법은 5권 6장 영원론 하나에 국한되지 않는다. 작품은 기술 논변과 인식 양태 논변과 조건 필연성 개념을 모두 문제의 해법으로서 아우른다. 본 논문은 이 모든 요소들을 유기적으로 고려할 경우에만 보에티우스적 해법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보에티우스적 해법은, 단지 신이 미리 아는 것을 부정하는 데 있기보다는, 신의 앎과 우리의 만사에서 성립하는 동시성을 확보하는 데 있다.
이러한 해석적 주장을 위해 본 논문은 먼저 보에티우스 자신이 직접 제기하였던 문제의 성격이 무엇인지 검토하고자 하였다. 먼저 보에티우스는 5권 3장에서 기존의 해법으로서 오리게네스적 해법(Origen solution)을 거부한다. 오리게네스적 해법은 신의 예지와 미래사의 인과 관계를 주목한다. 예지가 미래사의 원인인 것이 아니라, 오직 미래사가 예지의 원인일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필연성을 미래사가 아닌 예지로 넘기는 전략이라고 보에티우스는 이해한다. 그러나 보에티우스는 비대칭적인 방향의 인과가 설정될지라도 여전히 대칭적으로 필연성이 남는 경우를 보이면서, 우리의 문제는 원인의 순서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는 문제의식을 드러낸다. 그리고 본 논문의 해석에서 그의 문제의식은 앎(scientia)과 믿음(opinio)을 구분하는 인식론적 전통에 기반한다. 그에 따르면, 앎은 그 자체로서 앎의 대상에 확실성과 필연성이 담보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신은 단지 믿음이 아닌 앎을 가지는 존재이기에, 바로 이 앎이 필요로 하는 조건이 운명론에서 문제시되는 것이다. 따라서 독자는 논의의 방향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앎의 성격에 대한 탐구가 요청되며, 또한 그 앎이 필요로 하는 필연성의 성격에 대한 탐구도 요청될 수 있기 때문이다.
5권 4장 이후 자신만의 해법으로 가는 여정에서 보에티우스는 실제로 그러한 탐구들을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보에티우스는 먼저 기술 논변을 통해 우리의 일상적 경험에서 해법의 단초를 발견하고자 한다. 두 가지 지점이 주목될 수 있다. 첫 번째, 기술의 영역에서는 본성상 필연에 의하지 않은 것들이 가능하다. 본 논문은 이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 고전철학의 맥락을 주목한다. 더 좋은 것으로의 변화를 전제하는 기술에 대한 고전적 이해, 그리고 모든 것이 필연적이었더라면 우리의 기술은 무용하였을(inars) 터라는 게으름 논변의 착상을 고려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그와 같이 본성상 필연에 의하지 않은 것을 우리가 현재 관찰하고 있을 때, 현재적인 시선은 대상의 본성을 훼손하지 않는다. 보에티우스는 현재에 대한 동시적인 앎이 이러하다면, 미래에 대한 앎도 그러할 수 있다는 주장을 제시한다. 물론, 문제들이 제기된다. 설령 고정적이지 않고 필연적이지 않은 것들이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어떻게 그것들에 대하여 앎이 성립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본성상 필연에 의하지 않은 영역을 열어두는 것은 오히려 앎이 불가능한 영역을 말한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만약 현재적 관찰의 사례에서 그에 대한 답변을 얻고자 한다면, 미래에 대한 앎이 어떻게 현재의 시선과 같을 수 있는가? 이러한 맥락 속에서 보에티우스는 앎 개념 자체에 대한 검토로 나아간다.
보에티우스는 5권 4장과 5장에 걸쳐서 인식 양태 논변을 제시한다. 이는 흔히 이암블리쿠스 원리(Iamblicus Principle)라고 불리는 주장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앎은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인식하는 것의 능력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여기서 보에티우스는 구체적으로 감각(sensus), 상상(imaginatio), 이성(ratio), 이지(intelligentia)라는 네 종류의 앎을 제시한다. 네 가지 앎들은 각각 고유한 대상을 갖는다. 질료가 섞인 형태, 질료 없는 형태, 종/보편자, 순수한 형상이 그것들이다. 주목할 점은 이 앎들이 위계질서를 이룬다는 점이다. 가장 상위 단계의 앎인 이지는 네 가지 대상을 모두 자신만의 방식으로 파악하는 반면, 가장 하위 단계의 앎인 감각은 그저 질료가 섞인 형태만을 파악할 뿐이다. 내가 이해하기에 보에티우스는 이러한 인식론적 주장에 대한 정당화 또한 제공한다. 한 가지 방식은 영혼을 수동적인 것으로 파악할 뿐인 스토아 인식론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데, 영혼이 감각 기관을 통해 외부 자극에 영향을 받을지라도 자신만의 능동적인 힘을 갖는다는 것이다. 다른 한 가지 정당화는 일종의 생물학적 원리를 도입하는 전략을 통해 제공된다. 네 가지 인식이 각각 할당되는 실체들로서 움직일 수 없는 생물, 움직이는 동물, 인간, 신적인 종이 언급된다. 신적인 종을 제외하면, 인식 주체가 가진 생물학적 특성과 자연본성에 따라서 인식적 능력이 적절하게 허락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섭리의 조화로운 배치에 근거한 사태인 셈이다.
흥미로운 점은 보에티우스의 해법이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보에티우스는 분명 인식 양태 논변을 통해 인간 이성이 닿기 어려운 인식적 영역을 확보하고 있으니, 그는 여기서 일종의 불가지론으로 논의를 마무리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른 길을 간다. 신의 본성을 해명하고 신의 앎이 갖는 구체적 성격을 밝히기 위해 힘쓰는 것이다. 5권 6장에서 그는 잘 알려진 자신의 영원론을 제시한다. 신은 영원하며, 영원하다는 것은 끝이 있을 수 없는 삶에 대한 동시적으로 전체적이고 완전한 소유이다(Aeternitas igitur est interminabilis vitae tota simul et perfecta possessio). 본 논문의 해석에서 이는 결국 신이 자신의 사유 활동으로서 삶을 지금이라는 현재적 순간에 모두 동시적으로 갖는 것이었다. 영원한 존재자의 삶에서는 과거도 미래도 없이 모든 것이 현재적이며, 더 먼저이거나 더 나중일 것도 없이 모든 것이 동시적으로 소유된다. 바로 이러한 까닭으로 보에티우스는 신의 앎이 현재에 대한 앎과 같다는 주장을 제시하게 된다. 그리고 보에티우스는 주장한다. 기술 논변에서 이미 제시되었던 바,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것에 대한 동시적인 앎이 대상의 본성을 훼손하지 않은 것처럼, 그렇게 신의 현재적인 앎도 대상의 본성을 훼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미래사에 대한 신의 앎은 예지(praevidentia)라기보다는 차라리 섭리(providentia)라는 것이다.
따라서 보에티우스는 넓은 의미에서 앎의 성격을 탐구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해법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앎이 대상의 확실성과 필연성을 요구할 때, 우리의 즉각적인 시선에서 발견되는 앎은 확고하면서도 대상의 본성을 훼손하지 않으며, 바로 이 모형이 신학적 운명론의 해결에서도 적용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이 영원한 현재로부터 우리의 만사를 모두 현재적인 것으로서 바라본다면, 앎과 자유의지가 모두 성립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앎이 성립할 수 있는 이유, 혹은 그 앎이 만족시키고 있는 필연성은 어떠한 종류의 것인가? 보에티우스는 작품의 말미에서 필연성 자체에 대한 탐구에 이름으로써 자신의 해법을 상세화한다. 그는 단순 필연성과 조건 필연성을 구분한다. 태양이 뜨는 것은 본성에 의한 것으로서 단순 필연적이다. 조건 필연성의 사례는 두 가지이다. 소크라테스가 걸어가고 있을 때, 바로 그 때, 소크라테스가 나아가고 있는 것은 조건 필연적이다. 소크라테스가 걸어가고 있다는 것을 누군가 알 때, 바로 그 때, 소크라테스가 나아가고 있는 것은 조건 필연적이다. 본 논문은 첫 번째 사례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제론』 9장에 대한 보에티우스의 두 주석에 나타난 사례와 동일한 구조를 취한다는 점을 주목한다. 그에 따르면, 보에티우스는 조건 필연성이 오직 현재 시간에 대한 조건이 첨가된 경우에만 성립하며, 이는 본성에 의한 단순 필연성을 함축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 개념을 신학적 운명론의 맥락에서 앎의 경우에도 적용시킨 것으로 보인다. 영원론을 통해 신의 앎과 앎의 대상이 현재 동시적이라는 점이 확보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유로운 본성으로부터 행해진 인간사는 그 자체로는 단순 필연적이지 않지만, 신의 현재적 시선이라는 조건의 관점에서는 필연적이라는 주장이 제시된다.
만약 보에티우스의 해법에 대한 본 논문이 해석이 나름의 설득력을 가진다면, 다음의 두 가지 측면을 더불어 고려할 수 있을 것 같다. 한 가지 측면은 그가 문제를 제기한 이후 해법을 제시하는 데 이르기까지 작품을 통해 보여준 유기성이다. 일반적으로 『철학의 위안』 5권은 몇 줄의 짧은 논증으로 갈무리되어 소개되고는 하였으나, 보에티우스는 자신의 해법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에서 여러 철학적 요소들을 차근히 쌓은 것으로 보인다. 보에티우스는 자신이 마주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일상적 경험에서 실마리를 찾고자 시도하였다. 그리고 이를 신학적 운명론의 문제에 적용시키기 위해 인식 양태 논변이라는 인식론적 주장과 영원론이라는 형이상학적 주장을 개진하였다. 최후에는 자신의 해법을 상세화하면서 조건 필연성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였다. 작품의 철학적 유기성을 고려하는 일은 작품에 대한 풍부한 이해를 도울 수 있을 것 같다. 다른 한 가지 측면은 그 과정에서 보에티우스가 취하였던 모종의 방법론이다. 그는 최초의 문제제기에서 철학사적 전거를 가진 오리게네스적 해법을 고려하였다. 또한, 기술에 대한 고전철학적 이해들을 바탕으로 삼는 기술 논변을 제시하였으며, 인식 양태 논변에서는 스토아 학파의 인식론을 논의하였다. 그리고 그는 신플라톤주의적 영원 개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영원론을 지나,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조건 필연성을 신학적 운명론의 문제에 적용시켰다. 보에티우스는 고전철학을 중세에 전한 전달자나 보고자로서 곧잘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본 논문의 재구성에서 그는 생전에 습득한 철학사적 지식들을 활용하여 죽음 직전에 마주한 신학적 운명론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시도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독창적인 방식으로 보에티우스적 해법을 고안한 인물이기도 하다.
Language
kor
URI
https://hdl.handle.net/10371/178535

https://dcollection.snu.ac.kr/common/orgView/0000001685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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