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blications
Detailed Information
1798년에 편찬한 『영남인물고』와 그 위상
DC Field | Value | Language |
---|---|---|
dc.contributor.author | 이재두 | - |
dc.date.accessioned | 2022-05-04T07:09:16Z | - |
dc.date.available | 2022-05-04T07:09:16Z | - |
dc.date.issued | 2021-06-01 | - |
dc.identifier.citation | 규장각, Vol.58 No., pp. 535-578 | - |
dc.identifier.issn | 1975-6283 | - |
dc.identifier.other | 21-580015 | - |
dc.identifier.uri | https://hdl.handle.net/10371/179627 | - |
dc.description.abstract | 1798년(정조 22)에 편찬한 嶺南人物考 는 출판에까지 이르지 않았고, 복본을 두지 않
은 유일 필사본이다. 수록 인물의 극히 일부는 생몰 시기나, 행적이 사실과 다르기도 하다. 정조 말 경상도 사족들은 해동인물고 의 제작 관련 정보를 오해하여 소문을 듣고는 자신들의 선조를 해동인물고 에 수록하기 위하여 관련 문적을 들고 다수의 인물이 상경하였다. 소문의 단초는 역대 경상도의 유명 인물을 알고자 했던 정조가 김희락에게 영남문적 수집을 지시하면서 시작되었다. 김희락도 참가하고 있던 해동인물고 는 이전에 편찬한 국조인물고 의 장황한 내용을 요약하 는 작업이었다. 그런데 경상도 사족들이 선현의 문적을 들고 몰려들면서 이들을 무마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에 해동인물고 와 별도로 당시 거둬들인 영남문적을 바탕으로 요약 정리한 것이 영 남인물고 이다. 경상도 사족의 조상 현창과 정치 참여 욕구 여론을 무마하기 위한 정조의 임시변 통책이었다. 따라서 해동인물고 와 별도로 영남인물고 를 편찬한 것을 영남우대책으로 보기는 어렵다. 무엇보다도 정조가 御定人物考 편찬을 준비하고 있던 상황에서 특정 지역만을 대상으로 한 인 물고를 굳이 출판할 필요는 없었다. | - |
dc.description.sponsorship | 이 논문은 2021년도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연구지원을 받아 수행한 연구임. | - |
dc.language.iso | ko | - |
dc.publisher |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 - |
dc.subject | 「嶺南人物考」 | - |
dc.subject | ‘御定人物考’ | - |
dc.subject | 正祖 | - |
dc.subject | 金熙洛 | - |
dc.subject | 慶尙道 | - |
dc.title | 1798년에 편찬한 『영남인물고』와 그 위상 | - |
dc.type | SNU Journal | - |
dc.citation.journaltitle | 규장각 | - |
dc.citation.endpage | 578 | - |
dc.citation.pages | 535-578 | - |
dc.citation.startpage | 535 | - |
dc.citation.volume | 58 | - |
- Appears in Collections:
- Files in This Item:
Item View & Download Count
Items in S-Space are protected by copyright, with all rights reserved, unless otherwise indic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