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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澤榮 詩文學 硏究 : 金澤榮詩文學硏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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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양설

Advisor
이종묵
Issue Date
2022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Keywords
金澤榮文人意識神韻生氣한말憂國詩高宗비판辛亥革命共和政인식原始儒敎
Description
학위논문(박사) -- 서울대학교대학원 :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2022. 8. 이종묵.
Abstract
本文以朝鮮末期的代表文人滄江金澤榮(1850-1927)的漢詩作品爲硏究對象,通過梳理其文學活動、重構其詩論體系,闡明其漢詩的藝術手法及思想內容上的特徵與成就,實現對其漢詩作品的綜合性、深入性的硏究。目前有關金澤榮漢詩藝術的先行硏究,著重將其與淸初文人王士禎的神韻詩論相聯繫,闡明其淸遠詩風的藝術特徵,從而忽視了金澤榮漢詩中佔有重要比重的雄渾詩風以及與此相關的詩論。同時,有關金澤榮漢詩思想內容的硏究,對其詩中所反映的憂國憂民思想、共和制認識等現實認識的評價褒貶不一,亟待立足於深入硏究的綜合性評價。本文將解決這兩點問題作爲立論的出發點,並將金澤榮所具有的以文學之士自任的自覺意識定義爲文人意識,將此作爲理解其文學成就及其時代對應方式的關鍵詞。
首先,第二章爲了考察金澤榮漢詩創作的個人及文壇背景,分期梳理了金澤榮作爲文人的生活軌跡及各階段的文學創作活動。金澤榮早在受業期(1856-1872)即專攻詩文之學,以此爲基礎,在科舉應試期(1872-1891)與開城地方文人及漢陽南社、北社的官僚文人展開了活躍的詩文交流,在此過程中,得以被公認爲京、鄉詩壇的一流詩人。另一方面,金澤榮在1880年以後開始展開了立足於文學的學術活動—— 朝鮮史書的編纂和刊印工作,此事成爲了他此後生涯中的首要事業。在仕宦期(1891-1905,1909),金澤榮在與伊藤博文等日本人酬唱的詩文中,大膽表達了對日本侵略野心的警告和諷刺,從而實踐了其文章華國的抱負。與此同時,他在此期開始刊印自己的著作,這些活動使他獲得了全國性的文學名望。在中國流亡期(1905-1927),金澤榮著手開展了朝鮮文學史的整理工作——編印朝鮮著名文人的詩文選集和別集,這其中也包括了自己文集的編印。同時,他也開始構建和提出自己的文學主張。這些活動爲他在當時即被推尊爲朝鮮當代的漢文學大家發揮了重要的推動作用。綜上可知,金澤榮始終以文人立身,履行了文人應擔負的使命和職責。
第三章首先重構了金澤榮的詩論體系,以作爲深入闡明其漢詩美學的理論基礎。金澤榮爲了糾正朝鮮末期及淸末民初詩壇中盛行的復古風、性靈風、宋詩風的弊病,樹立以盛唐詩風爲典型的漢詩正統,提出了生氣這一漢詩的美學理想。根據金澤榮的論述可知,生氣屬於漢詩的深層美感,具體指詩歌充沛昂揚的氣勢與音響,以及豐華含蓄的韻致。要實現這一美學理想,需要作者以從性靈中自然流露的興感作爲創作動機,將感情(虛)與景物(實)作爲詩歌的主要素材,精密構思詩歌的义理,在此基礎之,運用章法恰到好處地組織詩歌起承轉合的篇章結構。通過對生氣這一詩歌深層次美感的推崇,金澤榮欲在克服復古派模擬弊病的同時,提出實現詩人性情、詩歌深層美感、詩人創作個性同時具足的漢詩創作的可能性。這種欲糾正當代詩壇弊病,樹立典型詩美爲漢詩正統,並爲此進行理論探索的自覺意識,即是金澤榮文人意識的重要表現。
根據金澤榮的詩論及同時代文人對其漢詩作品的評價,本文歸納了金澤榮詩歌中實現了生氣美感的三種主要詩風,並通過作品分析具體闡明了各詩風的藝術特徵。首先,金澤榮在絕句和律詩中,通過修飾與搭配景物色彩的手法,流暢連結詩歌時、空間的章法,以及調和音律的手法,形成了明麗、流暢的詩風。該詩風的詩歌使得詩人的興感得到了含蓄婉轉的表達,實現了餘韻悠遠的生氣。金澤榮的另一部分律詩中,通過精緻佈局景物的手法,工巧煉飾詩歌形式的手法,拓展、交錯詩歌時、空間佈局的章法,以及對篇章結構進行頓挫安排的章法,形成了精麗、雄健的詩風。該詩風的詩歌使得詩人的興感得到了嚴整而含蓄的表達,實現了氣勢雄健且韻味深厚的生氣。金澤榮的長篇古詩通過連續使用多種修辭並引入豐富神話形象的手法,賦的鋪陳的章法,以及錯綜佈局韻腳、長短句的章法,形成了奇麗、縱橫的詩風。該詩風的詩歌藉助痛快淋漓而變化莫測的景物描寫來寄託詩人的興感,實現了氣勢滂薄且含蘊豐富的生氣。在唐詩風久經衰微且時代危機日趨嚴重的末世背景之下,金澤榮依然能夠創作出如上華美而雄健的實現了盛唐詩生氣美感的漢詩,以此不僅抒發了對自然美景的興致,也寄託了個人感懷乃至憂國情懷等豐富多樣的情感,足以稱得上是朝鮮漢詩史上取得了卓越藝術成就的最後一位大家。
第四章著重對金澤榮吟詠時事的漢詩作品中所反映的現實認識進行了系統性的分析,從而闡明了金澤榮漢詩思想內容上的成就。首先,通過重新闡釋金澤榮的道文論,解析了他所具有的文人意識的邏輯內涵,從而揭示了金澤榮能夠通過詩歌寄託其現實認識的理論基礎。金澤榮將文學視爲與經學相對等的獨立學問,但他仍認爲文學應當植根於道。不過,他刻意強調此道並非性理學之道,而爲孔孟之道,且將其視爲應適應時代課題而不斷更新的具有開放性的原理與學問。同時,針對當時富國強兵爲首要時代課題的社會現實,金澤榮提出了應由文學才能出衆的文人來專門從事文學創作的適性論。金澤榮的文人意識正是建立在如上文學認識的基礎之上。基於這樣的文人意識,金澤榮將文學視爲自己畢生的職責,並在後期逐漸將文學創作的重點由純文學創作轉向了史書編篡這一能夠總結治亂得失歷史教訓的更具有現實意義的文學創作。得益於此,他在史書中所提出的對朝鮮亡國教訓的思考也浸入到了他的漢詩創作之中,使其漢詩具有了更加深刻的思想內涵。同時,通過對金澤榮吟詠歷史的《平壤長句》(1875)的分析,可以具體確認金澤榮在詩中抒發的,欲發揮其文學才能,通過史書編纂來保存本國歷史與文化,通過文學創作來實現文章華國抱負的文人意識。
金澤榮在歌詠朝鮮末期時事的漢詩作品中,反映了他對朝鮮軍事、經濟、政治等方面的多重危機的深刻憂慮,以及對以高宗爲首的朝鮮統治者的諷諫意識和強烈的批判意識。這些作品所蘊含的金澤榮的危機解決方案體現了他重視實用學問、追求身分平等、要求限制專制王權等的思想傾向,這些思想傾向與朝鮮甲午更張以來開化派官僚所推進的一系列改革舉措適相吻合,由此可見金澤榮對開化期時代思潮的積極吸取和接受。
在流亡中國期間,金澤榮以朝鮮遺民自處,在遺民意識的作用之下,時刻關注與朝鮮局勢唇齒相依的中國時局,並創作了一系列反映中國時局的漢詩。根據對這些詩歌的分析可知,金澤榮對辛亥革命的積極擁護,是其固有的傳統華夷觀念、對排滿革命思潮的接受、對於晚淸軍事外交之羸弱以及統治腐敗的批判、以及對新成立的民國政府執政能力的樂觀預測等多重認識綜合作用的結果。另一方面,金澤榮對民初共和制的認識雖然仍局限在儒教觀念的框架之內,但其中也可發現批判專制的新的思想面貌。同時,民初的政局動盪也是導致他未能進一步深入了解共和制度,而只止於創作漢詩猛烈抨擊民初軍閥腐敗統治的重要原因。
通過上述對金澤榮反映社會現實漢詩作品的分析,可以勾勒出他在對應時代課題時,在始終以儒道作爲思想立足點的基礎之上,對近代西方文明進行自主性吸收的思想探索的脈絡。因此,這些漢詩作品可以充分納入他以文學應對時代課題的實踐活動的成果範圍。這些作品深入反映了近代中韓兩國的社會現實,以及身處這一時代變局之中的傳統儒家知識分子的典型心態和思想面貌,從這一點上,可知金澤榮漢詩在思想內容上所具有的重要意義。
본고는 한말의 대표적인 문인 滄江 金澤榮(1850~1927)의 문학 활동, 詩論, 한시의 예술적·내용적 특징과 성취를 규명함으로써 그의 한시에 대한 종합적이고 심층적인 연구를 시도하고자 했다. 김택영의 한시에 대해서는 청나라 문인 王士禎의 神韻論과 연결 지어 그 淸遠한 시풍을 규명하는 데 치우친 연구가 주로 이루어져 김택영의 雄渾한 시풍 및 관련 詩論이 간과되어 왔다. 이와 더불어 지금까지 논쟁거리가 되어온 김택영의 시에 반영된 憂國意識, 憂民意識, 共和政 인식 등 그의 현실 인식을 평가하는 문제 역시 체계적으로 재조명되어야 한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이 두 가지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김택영이 가지고 있었던 강한 문인으로서의 자각을 文人意識이라고 규정하고 이를 그의 독자적인 문학 성취와 시대대응 방식을 일관적으로 이해하는 키워드로 삼고자 했다.
먼저 제Ⅱ장에서는 김택영의 한시창작의 個人的·文壇的 배경을 확인하기 위해 문인으로 살았던 그의 삶과 문학 활동을 시기별로 재구했다. 김택영은 수학기(1856~1872)에 문학에서 학문적 출발을 했고, 과거응시기(1872~1891)에 開城 지역문인 및 서울 南社·北社의 관료문인들과 활발한 시문교류를 나눔으로써 京鄉 詩壇에서 일류 시인으로 추존되었다. 사환기(1891~1905, 1909)에는 이토 히로부미 등 일본인과 창화하는 자리에서 일제의 침략야욕을 경계하고 풍자하는 시를 지어 나라의 존엄을 지키는 조선 文臣으로서의 소임을 다했고, 각종 저술들이 간행됨에 힘입어 전국적인 文名을 얻었다. 중국 망명기(1905~1927)에는 조선 문인들의 문집 편간 활동을 펼쳐 조선 문학사를 정리했다. 그 일환으로 문집을 自編하고 문학 주장을 내세움으로써 자신을 당대의 한문학 대가로 위치시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한편 김택영은 1880년대부터 조선 역사서의 편간 사업에 헌신함으로써 문학에 기반한 유교적인 학문 활동을 펼쳤다. 이처럼 김택영은 평생 문인으로 살아오면서 문인으로서의 역할을 다했다.
제Ⅲ장에서는 먼저 김택영의 詩論을 규명함으로써 그 한시의 文藝美를 심층적으로 이해하는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다. 김택영은 韓末과 淸末民初 詩壇에서 성행한 復古風·性靈風·宋詩風의 병폐를 바로잡고 盛唐詩風을 시의 正統으로 내세우고자 生氣라는 한시의 미적 이상을 제기했다. 生氣는 작품의 심층적인 미감으로, 강한 기세·음향과 소탕한 운치로 규정될 수 있다. 김택영은 생기를 구현하는 데 작자의 性靈에서 우러나는 興感에 기반해 감정(虛)과 경물(實)을 시의 주요 소재로 하는 한편, 시의 이치를 정밀하게 구상하고 기승전합의 章法을 꼭 맞게 조직하는 방법론을 제기했다. 이로써 복고파의 模擬의 폐단을 극복하면서도, 시인의 性情을 반영하고 한시가 갖춰야 하는 심층적인 미감을 구현하며 시인의 개성을 드러내는 시풍을 실현할 가능성을 제시하고자 했다. 이와 같이 당대 시단의 병폐를 바로잡고 한시의 正統을 수호하는 뚜렷한 의식을 지니고서 이론적 탐색을 한 점에서 김택영의 文人意識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김택영의 시론 체계에 근거해 生氣를 구현한 그 시의 세 가지 주요 시풍을 추출하고 각각의 예술적 특징을 구명했다. 우선 절구와 율시에서는 경물을 밝고 화려하게 장식하는 수법, 시의 時·空間을 유창하게 연결시키는 章法, 음률을 화합하게 다듬는 수법을 통해 明麗·流暢한 시풍을 형성하였다. 이 시풍의 시는 시인의 흥감을 함축적으로 형상화하여 운치 있는 生氣를 구현했다.
김택영의 율시는 경물을 정치하게 배치하는 수법, 시의 형식을 정교하게 다듬는 수법, 시의 時·空間을 넓게 구축하거나 착종시키는 章法, 全篇의 구조를 우여곡절 있게 배치하는 章法을 통해 精麗·雄健한 시풍도 구현하였다. 이 시풍의 시는 시인의 흥감을 엄정하면서도 함축적으로 형상화하여 기세가 강하고 운치 있는 生氣를 구현했다. 김택영의 장편고시는 다양한 수사법을 연이어 사용하며 神話的 이미지를 풍부하게 끌어들이는 수법, 賦의 鋪陳의 章法, 換韻·長短句를 배합하는 章法을 통해 奇麗·縱橫한 시풍을 이루었다. 이 시풍의 시는 시인의 흥감을 통쾌하면서도 변화무상한 경물 묘사를 빌려 형상화하여 기세 넘치고 운치 있는 生氣를 구현했다. 唐詩風이 쇠약하고 시대적 위기가 극심한 말세에도 이와 같이 아름다우면서도 기세 넘친 生氣 있는 당시풍을 구현해 자연에서 느낀 흥취, 개인의 회포, 내지 우국적인 감정을 형상화했기에 김택영은 조선 한시사상 최후의 대가로 평가될 수 있었다.
제Ⅳ장에서는 김택영의 시의 내용적·사상적 성취를 규명하기 위해 역사·時事 관련 내용이 담긴 그의 시 작품을 면밀히 분석했다. 먼저 김택영의 道文論을 재검토해 그가 가지고 있는 文人意識을 규명함으로써 그가 시로 현실인식을 형상화할 수 있었던 이론적 기반을 규명했다. 김택영은 문학을 경학과 대등한 독립된 학문으로 간주하면서도 여전히 문학의 연원을 도에 두고 있었다. 그리고 도를 성리학이 아닌 孔孟의 도로 보고, 이를 시대적 과제에 대응해 부단히 경신되어야 하는 개방적인 학문으로 이해했다. 아울러 부국강병이 시대적 과제였던 당시의 현실에서 문학적 재능이 뛰어난 자만 문학에 종사해야 한다는 適性論을 제기하고, 이러한 논리 기반 위에서 문인으로 자처한 뚜렷한 文人意識을 가졌다. 이러한 문인의식 하에 김택영은 문학을 필생의 소임으로 삼았고, 후기에 갈수록 문학 창작의 중점을 純文學보다 治亂得失의 교훈을 제시할 수 있는 문학 창작인 역사서 편찬에 두었다. 이에 힘입어 역사서에서 제시한 亡國 교훈을 시로도 형상화하여 시의 사상적 깊이를 심화시킬 수 있었다. 아울러 역사를 읊은 김택영의 「平壤長句」(1875)에 대한 분석을 통해 스스로의 문학적 재능을 자부해 자국 역사와 문물을 보존하거나 문학으로 나라를 빛내는 등 문인의 공업을 세우고자 한 김택영의 문인의식을 확인했다.
한편, 한말의 시국을 읊은 김택영의 시 작품들에는 나라의 군사·경제·정치 등 다방면의 위기에 대한 우려, 고종을 비롯한 위정자에 대한 諷諫과 파격적인 비판의식이 형상화되어 있다. 이 시들에 함축된 김택영의 대응책들은 실용적인 학문을 중시하고, 신분적 평등을 추구하며, 專制 왕권에 대한 제한을 요구하는 등의 지향이 나타나 갑오경장 이래 개화파 관료들이 추진한 개혁 조치들과 상당 부분 합치했음을 확인했다.
중국 망명기에 김택영은 조선의 遺民으로 자처한 遺民意識 하에 조선과 운명을 같이한 중국 정국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 관찰을 시로 형상화했다. 이 시들에 대한 분석에 따라 김택영이 辛亥革命을 지지한 데에는 전통 화이관, 반만주(排滿) 혁명사조의 영향, 청나라의 군사적·외교적 실책과 부패한 정치에 대한 비판, 새로 성립된 민국 정부에 대한 낙관 등 다양한 인식이 작용했음을 조명했다. 그리고 김택영이 유교의 틀에서 민국 초기의 공화제를 이해했으나 專制를 비판하는 입장에서 공화제를 옹호했다는 점을 통해 그의 새로운 사상적 면모를 포착했다. 또한 민국 초기의 정치적 혼란상이 그로 하여금 공화제를 진일보한 입장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군벌들을 맹렬하게 비판하는 시를 짓는 데 그치게 한 중요한 원인이었음을 지적했다.
이상의 분석을 통해 시대적 과제에 대응하기 위해 유교를 기반으로 서양 문명을 자주적으로 흡수하고자 한 김택영의 사상적 모색의 맥락을 추적해 볼 수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時事를 읊은 김택영의 시 작품들은 그가 문인으로서 시대 대응적인 실천을 한 성과물 중 하나로 거론될 수 있었다. 이처럼 김택영의 한시가 근대전환기의 현실과 이 시대를 살았던 유교지식인의 현실에 대한 고민을 형상화했다는 점에서 내용·사상적으로도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음을 밝혔다.
Language
kor
URI
https://hdl.handle.net/10371/188421

https://dcollection.snu.ac.kr/common/orgView/0000001737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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