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blications

Detailed Information

식민지 조선에 재현된 일본불교 영장(靈場)의 석상 연구 : Stone Images of Japanese Buddhist Pilgrimage Routes Recreated in Colonial Korea

Cited 0 time in Web of Science Cited 0 time in Scopus
Authors

최종은

Advisor
이주형
Issue Date
2023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Keywords
지방영장(地方靈場)우쓰시영장(写し霊場)순례근대 불교조각재조선 일본인일본불교
Description
학위논문(석사) -- 서울대학교대학원 : 인문대학 고고미술사학과(미술사학전공), 2023. 2. 이주형.
Abstract
본 논문은 식민지 조선에 일본불교의 순례 영장을 재현하는 데에 사용되었던 한국 소재 일본식 석상의 도상, 제작 배경, 활용의 양상과 기능을 종합적으로 밝힌 글이다. 일본에서는 예로부터 신과 불보살이 머무는 곳 내지는 영험한 장소인 영장(靈場)을 순례하는 문화가 발달했다. 에도시대(江戸時代, 1603-1867)에는 영장 순례가 대중화되면서 사이고쿠33소관음영장, 시코쿠88소영장과 같이 널리 알려진 영장을 각 지역에 축소하여 재현한 지방영장(地方靈場)이 활발히 조성되기 시작했다. 근대에는 일본 본토뿐 아니라 일본인 다수가 이주했던 조선, 대만, 하와이 등지에도 지방영장이 만들어졌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식민지기(1910-1945) 지방영장을 구성했던 소형 석상들이 발견된다. 필자는 지방영장 석상의 개별 사례를 소개한 선행 연구의 성과로부터 더 나아가 영장 순례와 관련된 일본의 불교 회화, 출판물과의 비교를 통해 석상의 시각적 특징을 고찰하고자 했다. 또한 동시대 언론, 지방지(地方誌), 사진엽서 속 단편적 기록과 일본, 대만 등지의 사례를 참조하여 식민지 조선에서 지방영장 석상이 제작되고 활용된 양상을 규명하려 했다.
기록에서 확인되는 식민지 조선의 지방영장 18곳을 종합하면 지방영장은 대부분 부산, 인천, 원산, 마산, 경성, 회령 등 식민지기 일본인이 다수 거주했던 지역에 만들어졌다. 지방영장을 조성한 이는 조선에 이주해 살던 일본인들이었다. 그들은 일군의 석상을 제작하고 거주지 혹은 인근 공터나 야산, 일본불교 사원의 경내에 이를 봉안하여 지방영장을 조성했다.
지방영장 석상은 사이고쿠 영장이나 시코쿠 영장의 33개, 88개 사원 본존을 대리하는 모각상(模刻像)으로 제작되었다. 그러나 각 본존의 모습이 석상에 정확하게 재현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지방영장 조성의 핵심 과제는 33개나 88개, 경우에 따라서는 그 이상의 석상이 모여 하나의 세트로서 사이고쿠 혹은 시코쿠 영장 전체를 재현하는 것이었다. 현재 서울 화계사, 군산 동국사를 비롯하여 국내 각지에서 발견되는 석상의 도상을 『관음영장기도회』(1845)와 같은 영장 순례 관련 출판물을 통해 널리 알려진 각 사원 본존 도상과 비교하면 생략과 오류가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대신 일군의 석상은 재질, 조각 기법, 형태 등에서 일관성을 갖추어 세트로서 하나의 지방영장을 이루고 있음을 드러냈다. 각각의 석상에는 사원 번호나 서로 다른 종류의 불보살이 새겨져 본영장에 포함된 각기 다른 사원의 대리물로서 최소한의 개별성을 확보했다.
석상들에서 관찰되는 일관성과 개별성은 국내 소재 지방영장 석상 특유의 현상은 아니나 식민지 조선이라는 맥락에서 고유한 기능과 의미를 가졌다. 일본인들에게 식민지 조선은 기회와 불안이 공존하는 이주지였으며, 조선인이라는 거대한 타자 집단과 부대끼며 살아가야 하는 곳이었다. 그들은 일본인 공동체나 네트워크를 꾸려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하고 생활의 안정감을 추구했으며 성공적인 정착에 필요한 도움을 얻고자 했다.
석상으로 이루어진 지방영장은 조선의 일본인들이 결속을 도모하는 데에 기여했을 것이다. 지방영장을 통해 지역의 일본인들은 석상 시주자 집단을 비롯한 공동체 내지는 네트워크를 꾸렸다. 지방영장 시주는 한 석상에 1인 이상의 시주자가 배정되는 형태로 지역 일본인 사회에서 효과적으로 존재감을 발휘할 수 있는 시주 선택지였을 것이다. 시각적으로 일관성과 개별성을 갖춘 각 석상은 한 세트를 구성하는 특정한 개별 요소로 인식될 수 있었다. □번 석상 시주자로서 시주자들은 지방영장 조성에서 고유한 지분과 역할을 가졌으며 시주자 집단에 강한 소속감을 느낄 수 있었다. 석상은 시주자 집단과 각자의 지분을 지역 일본인 사회에 과시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지방영장에서 이루어진 지역 일본인들의 정기 순례 또한 친목과 결속을 다지는 기회였을 것이다. 오락적 요소를 동반한 정기 순례는 이주지에 재현한 고향 일본의 땅을 함께 거니는 일본인들의 지역 축제와도 같았다. 지방영장의 조성과 순례를 통해 재조선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공동체와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유지하며 일본인이라는 이름 아래 결속될 수 있었을 것이다.
This thesis examines the iconography and social context of small-sized stone images of Japanese Buddhist pilgrimage routes recreated in Colonial Korea. Japanese settlers in various regions of Colonial Korea made such regional pilgrimage routes (chihō reijō)―also called copied pilgrimage routes (utsushi reijō)―in their towns. These routes served as local versions of Saikoku and Shikoku pilgrimage routes, the most famous courses for Buddhist pilgrimage in Japan. As substitutes for the main icons (honzon) of each temple along these famous routes, stone images were installed in Japanese Buddhist temples, hills, and parks to form miniature versions of the routes.
Generally, these stone images were not singular reproductions of main icons; instead sets of stone images were created to collectively represent pilgrimage routes. This can be seen by comparing the stone images with the icons in Japanese woodblock prints related to famous pilgrimages, such as the Illustrated record of sacred Kannon places (Kannon reijōki zue); specifically, doing so reveals that the iconography of the former is relatively simple and incorrect. Meanwhile, uniformity can be observed in the set of stone images along a pilgrimage route; within this set, each stone image demonstrates minimal individuality so that it can serve as a substitute for different temples, with temple numbers and different types of deities inscribed on the images.
Regional pilgrimages and stone images placed along these routes connected Japanese settlers. Specifically, the settlers could form or enhance their communities and networks by erecting stone images and maintaining their pilgrimages. For instance, some settlers created a society of monetary contributors for stone images in which each contributor usually paid for one image. Since each image substituting for a particular temple was irreplaceable in the pilgrimage circuit, the contributor of each played an irreplaceable role and therefore likely felt a strong sense of belonging in their society. Notably, regional pilgrimages in Colonial Korea were made regularly and collectively by Japanese settlers. The settlers could use these events as opportunities to become acquainted and bond with each other.
本稿は、植民地朝鮮の地方霊場に設置されたものとして現在韓国に残っている石仏に注目し、その図像、造成の背景、活用の様態を明らかにする。植民地朝鮮の各地域に居住していた日本人たちは彼らが住む町に西国三十三所観音霊場や四国八十八所霊場を写した地方霊場(あるいは写し霊場)を造った。地方霊場の多くは、日本仏教宗派の寺院やその裏山もしくは里山等に位置したが、町の所々に札所が点在した事例もある。西国霊場と四国霊場の各札所の本尊が石仏に彫られ、参道に配置されて地方霊場を形成した。地域の日本人は集団を成して霊場を設けるための資金を賄った。
地方霊場の石仏が担った主な役割は、33個あるいは88個、場合によってはそれ以上の石仏が集まってひとつのセートとして西国や四国霊場全体を再現することにあり、それぞれの札所本尊の姿を正確に写すことは二次的な問題であった。現在ソウルの華溪寺、群山の東國寺等にある石仏の図像を『観音霊場記図会』など巡礼関係の書籍に見える札所本尊の図像と比較すると、石仏の図像に省略や間違いがあることが分かる。但し、ひとつの地方霊場を構成した一群の石仏は材質や様式上の統一性を持ち、この統一性は石仏がセートであることを表す。一方、それぞれの石仏には札所番号やその番号に応じた本尊が彫られ、セートでありながらも特定の一つの札所としての性格を示す。
石仏で設立された植民地朝鮮の地方霊場には、朝鮮の各地域に住んでいた日本人の紐帯を強める役割があったと思われる。地方霊場の造成や運営を通じて、その地域の日本人は講のような組織あるいは人脈を形成することができた。その例として石仏の願主の集団が挙げられる。願主は石仏一体に付き一人が指定されるのが普通であった。それぞれの石仏が、特定の札所としてのひとつの地方霊場の中で代替不可能なものであったように、それぞれの願主は、願主の集団の中で代替不可能な役割を担い、その集団に対する強い所属感を感じることができたと考えられる。地方霊場の巡礼は定期的な集団巡礼として行われた。巡礼は娯楽的な要素を伴い、祭りのような雰囲気をもっていた。在朝鮮日本人は移住地朝鮮に写した故郷の聖地としての地方霊場を一緒に巡礼しながら、親しみや繋がりを深めることができたのであろう。
Language
kor
URI
https://hdl.handle.net/10371/194227

https://dcollection.snu.ac.kr/common/orgView/000000175941
Files in This Item:
Appears in Collections:

Altmetrics

Item View & Download Count

  • mendeley

Items in S-Space are protected by copyright, with all rights reserved, unless otherwise indicated.

Sha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