옐리네크의 『피아니스트』에 나타난 마조히즘 연구

Abstract

옐리네크는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많이 논의되지만, 또한 마르크스주의자이기도 하다. 그녀의 작품에서 여성들은 가부장적 사회질서에서 희생자로 묘사되지만, 또한 자본주의적 질서 내에서 권력을 행사하며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 옐리네크의 여성인물들은 폭력의 희생자이지만 폭력의 가해자로 등장하기도 하는 것이다. 『피아니스트』의 주인공 에리카 역시 작품 초반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생존투쟁을 하며 성공 지향적 사회의 희생자로 묘사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녀는 자신이 클래식음악을 함으로써 예술에 무지한 일반대중, 노동자계층과 구분된다고 느끼며 전차 안에서 그들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이러한 폭력은 사실은 경제적 차원에서 이들과 동일한 상황에 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며, 여기서 쌓인 공격성을 이들에게 표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음악선생으로서 그녀는 학생들을 통제하고 검열하며 폭력을 가하기도 한다. 여기서 선생과 학생의 관계는 권력관계의 표시이며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 그러나 에리카의 폭력은 성과 무관한 권력관계에 있어서만 표출된다. 그녀의 이러한 폭력은 사디즘은 아닌데, 왜냐하면 그러한 가학적 쾌감에는 성적 쾌감의 요소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옐리네크가 가부장사회에 특징적인 것으로 묘사한 사디즘은 성에 대한 남성적 시선을 전제로 하는데, 에리카는 여성의 신체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남성의 시선으로 성을 바랄 볼 경우 아무런 쾌감을 얻을 수가 없다. 그 때문에 그녀는 가부장적 사회의 초자아와 섹슈얼리티를 공격하는 마조히즘적 태도를 취하며 성적 쾌감을 획득하려 한다. 에리카는 클레머와의 관계에서 마조히즘적 태도를 취하며 가부장적 사회의 섹슈얼리티를 부분적으로 뒤흔들어놓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가부장적 사회 내에서 마조히즘의 실현을 위한 공간을 발견하지 못하며 클레머의 사디즘적 폭력의 희생자가 되고 만다. 하지만 이러한 좌절을 단순히 마조히즘의 이상이 현실에서 실패한 것으로만 해석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에리카의 마조히즘적 구상에는 계산적 사랑이라는 자본주의의 불순한 요소가 침투해 있기 때문이다. 마조히즘적 태도와 낭만적 사랑 사이에서 동요하는 가운데, 양자의 순수한 존재는 에리카의 계산적 사랑에 의해 허구로 밝혀지며 탈신화화된다. 마조히즘이 표방하는 이상적 자아로서의 어머니의 차가운 감성은 자본주의 사회에 특징적인 에리카와 그녀의 어머니의 계산적 사랑으로 변질된다. 냉기 속에서도 감성을 유지하는 마조흐의 ‘모피를 입은 비너스’는 모피코트를 입고 싶어 자신의 몸을 조금씩 팔기 시작하는 타락한 비너스로 전락한다. 옐리네크의 한 연극의 주인공인 노라는 조금 더 자본주의적으로 타락한 에리카의 모습을 보여주며 이를 증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