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blications
Detailed Information
정조대 文孝世子의 喪葬 의례와 그 특징 : The Funeral Ritual of Munhyo seja(文孝世子), the Crown prince of King Jeongjo during King Jeongjo's reign, and its Character
Cited 0 time in
Web of Science
Cited 0 time in Scopus
- Authors
- Issue Date
- 2012-06
- Publisher
-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 Citation
- 규장각, Vol.40, pp. 103-143
- Keywords
- Munhyo seja(文孝世子) ; Funeral Ritual ; Gukjo Sang'rye Bo'pyeon(國朝喪禮補編) ; Hyojang crown prince(孝章世子) ; 문효세자 ; 상장례 ; 예장 ; 국조상례보편 ; 효장세자 ; 자최기년복
- Abstract
- 이 논문은 정조의 첫째 아들 문효세자의 사례를 통하여 조선시대 왕세자의 상장례의
절차와 그 특징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세자의 예장 절차에 관한 규정이 조선 중기까지 마련되지 않았다가 1752년․1758년에 편찬된
국조상례보편 에 처음으로 등록되었다. 이후 조선 왕실의 상장례는 1758년본 국조상례보편 에
따라 치러졌고, 이 전례서에 따라 치른 최초의 소상이 바로 문효세자의 예장이었다. 그렇다고 문
효세자의 상장 의례를 추진하면서 국조상례보편 에만 전적으로 의존한 것은 아니었고, 기본적인
규정은 국조상례보편 을 따르되 실제 행례할 때에는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의 예장을 전례로
삼았다.
문효세자는 1786년 5월 11일에 훙서했고, 윤7월 19일에 효창묘에 가서 장례를 치렀다. 윤달을
계산하지 않으면 훙서한 지 3월만에 장례를 치렀다고 볼 수 있다. 우제는 오우제까지 지내고, 喪
期는 삼년이 아닌 기년이었기에 소상제를 기점으로 자최기년복을 입었던 정조가 상복을 벗었다.
이후 대상제, 담제를 차례로 지냈고, 마지막으로 거행되어야 할 입묘 절차는 담제를 지내는 날
거행되어야 했지만 문희묘의 건립이 지연되면서 미뤄졌다. 문효세자 보다 4달 뒤에 졸한 생모 의
빈성씨의 사당과 함께 공역을 추진하면서 완공이 미뤄지다가 마침내 1789년에 가서야 문희묘에
봉안될 수 있었다.
세자의 예장이기 때문에 의절 담당자의 직위, 소용되는 물품수, 동원되는 인원수 및 각 의절을
거행할 때마다 국왕의 국장보다 한 등급 낮춘 채 진행되었다. 실제 행례할 때 효장세자의 예장을
전례로 삼았기에 정조는 참최삼년이 아닌 자최기년의 상복을 입고 기년으로 아들의 장례를 치
렀다. 이를 통해 현종대 복제 예송이 이 시기까지 여파가 미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
상장례를 치르는 동안 문효세자의 죽음을 둘러싸고 역적과의 공모, 독살설의 제기 등 정치적으로
크게 문제될 만한 일이 발생하기도 했지만 정조가 관련 의혹을 일축하고 의혹의 확산을 막고자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아 정치적으로 큰 문제없이 조용히 넘어갔다.
문효세자의 상장례를 중심으로 전체 논지를 전개했기 때문에 그 특징이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
은 측면이 있었다. 다른 세자의 예장과 비교할 때 그 특징이 드러나기 때문에 문효세자 예장의
전례가 된 효장세자의 상장례 및 다른 세자의 상장례를 검토함으로써 조선시대 세자 상장례의
흐름을 짚어보는 것을 다음 과제로 삼고자 한다.
- ISSN
- 1975-6283
- Language
- Korean
- Files in This Item:
- Appears in Collections:
Item View & Download Count
Items in S-Space are protected by copyright, with all rights reserved, unless otherwise indic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