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관계에 있어서 신뢰보호

Abstract

전통적으로 계약관계는 계약 당사자의 의사라는 관점에서 주로 조망되어 왔다. 그러나 계약관계는 계약 당사자의 신뢰라는 관점에서도 조망될 수 있다. 계약 당사자의 의사를 발견하여 이를 관철시켜 주는 것은 계약 당사자가 계약에 대해 가지는 신뢰를 보호해 준다는 의미도 있다. 따라서 두 관점은 적대관계에 있지 않다. 그러나 연혁적으로나 사상적으로 볼 때 두 관점 사이에 미묘한 긴장관계가 존재하게 된 것도 사실이다. 의사적 관점은 개인 본위의 사상적 토대 위에서 계약법의 주도적 지위를 차지하였으나, 신뢰적 관점은 공동체를 배려하려는 사상적 토대 위에서 의사적 관점에 대한 비판을 토대로 발전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많은 계약법적 쟁점들은 이러한 긴장관계의 틈바구니에서 발생하고, 이에 대한 해결의 모습도 그 균형점을 어디에서 찾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이처럼 계약법의 지형(地形)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신뢰보호의 문제는 계약관계의 각 단계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계약성립 이전 단계에서는 주로 민법 제535조의 계약체결상 과실이나 계약교섭의 부당파기와 계약교섭과정에서의 정보제공 등 계약체결 이전에 상대방의 언동을 믿은 계약 당사자의 신뢰보호 문제로 나타난다. 계약성립단계에서는 주로 청약이나 승낙을 받은 계약 당사자의 신뢰보호 문제로 나타난다. 계약해석단계에서는 주로 규범적 해석과 관련해서 계약내용이 무엇인지, 또한 계약의 당사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신뢰보호 문제로 나타난다. 계약존속 단계에서는 계약존속을 허물어뜨리는 취소, 무효, 해제 등의 사유를 얼마나 너그럽게 파악할 것인지, 그 과정에서 계약존속을 믿은 상대방의 신뢰는 어떻게 보호할 것인지의 문제로 나타난다. 이러한 존속신뢰보장의 문제는 계속적 계약관계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계약이행단계에서는 임의이행에 대한 신뢰보호, 임의이행이 좌절된 경우 강제이행 또는 손해배상을 통한 신뢰보호의 문제로 나타난다. 계약관계의 소멸단계에서는 채무이행으로 채권이 소멸되었다고 믿은 당사자의 신뢰보호 또는 더 이상 채무를 이행하지 않아도 된다고 믿은 채무자의 신뢰보호의 문제로 나타난다. 이처럼 신뢰보호의 문제가 여기저기서 나타나는 파편성(破片性) 때문에 이를 하나의 틀 안에서 묶으려는 시도가 그리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계약관계의 곳곳에서 다양하게 작동하는 신뢰보호는 한편으로는 효율성을 증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형평성을 증진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그러나 쌍방의 이해관계가 대립되는 상황에서는 일방의 신뢰를 보호하는 것이 곧 타방의 이익을 해할 수 있다. 따라서 계약관계에 있어서 신뢰보호는 무제한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고 일정한 선에서 멈추어야 한다. 이는 곧 신뢰보호의 요건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의 문제로 귀착된다. 정리하자면 신뢰야기자에 관한 요건으로는 그에게 귀책 가능한 신뢰야기, 신뢰자에 관한 요건으로는 이에 관한 정당한 신뢰와 이로 인한 신뢰투자가 각각 요구된다. 다만 이러한 요건은 추상적인 것이어서 실제 사안을 해결함에 있어서는 보다 구체적인 고려기준들을 동원할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는 그러한 고려기준들을 제시하였다. 궁극적으로는 이익형량이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